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 캔자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토마스 프랭크 지음, 김병순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극우 보수 세력을 시종일관 보수 반동 세력이라고 지칭한다. 저자의 어조는 신랄하고 직설적이다. 공화당의 사기와 조작 행태에 대해 분노마저 느껴진다. 이들에 대한 숨기지 않는 혐오감의 표출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진보 성향을 강하게 드러낸다. 이 책의 옮긴이도 옮긴이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마찬가지 정치적 성향을 지닌다. 게다가 독자로서의 본인은 아직까지는 심정적으로 진보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책의 분석 내용과 주장은 물론 촌평 또한 중도적이지 않고 일방에 편향되어 있음을 유념하기 바란다. 그것이 마뜩치 않다면 이 책은 당신의 성향에 맞지 않는다.]

 

선거는 정치적 지배체제의 변동을 촉발하는 역할을 한다. 야당은 현 정권의 부패와 무능을 비판하고 여당은 이를 방어하기에 급급하다. 이것이 과거 선거의 모습이다. 오늘날 선거 풍토는 그렇지 않다. 선거는 정권을 잡은 세력이 체제의 굳건한 안정을 담보하는 도구가 되고 있다. 이것은 정치에서 선거와 투표의 논리가 과거와는 달라졌음을 뜻한다. 저자는 캔자스 주를 분석 대상으로 미국인들의 정치와 선거의 성향이 바뀌게 된 과정과 현실을 통해서 간과되어 온 변화의 무시무시한 기저를 파헤친다.

 

왜 하필 캔자스 주이며, 일개 주의 분석 결과를 미국 전체로 확장해도 무리는 없을까? 우리의 의구심 해소를 위해 저자는 캔자스 주의 속성과 역사를 들려준다. 캔자스 사람들은 가장 평균적인 특성을 지닌 보통사람들로서 모든 미국인을 대표할 만한 전형성을 지닌 것으로 예부터 회자되었다. 더욱이 캔자스 주의 역사 또한 상징적이다. 캔자스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신화적 정체성을 뿌리깊이 간직하고 있다. 캔자스 주를 처음에 세운 사람들은 노예제가 서부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했던 북부 사람들이었다. 존 브라운라는 인물과 공립학교에서 인종차별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이끌어내었던 소송도 캔자스의 신화에 기여한다.

 

미국은 대표적인 양당제 국가로 구분된다. 일반적 인식에 따르면 공화당은 보수 성향으로 중산층과 부유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며, 민주당은 진보 성향으로 서민과 소수 인종을 대변한다. 캔자스 주는 당연히 오랫동안 민주당의 확고한 지지기반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 역학이 지난 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서서히 약화되더니 1990년대를 기점으로 극우 보수 세력이 압도적으로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으로 바뀌고 말았다.

 

캔자스 주에서 생긴 정치적 격변의 원인은 민주당의 정체성 포기와 공화당의 문화 이데올로기 전략이 교묘하게 맞물린 결과라고 저자는 갈파한다. 양당의 성격을 구분하던 경제적 계급의 이해관계는 한쪽의 자만과 방심과, 다른 한쪽의 교묘한 왜곡으로 더 이상 중대성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오히려 민주당이 중상류층의 이해를 대변하고 공화당이 가난한 자들의 대변자로 인식이 전도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오늘날 캔자스는 노동자계급이 사장들보다 훨씬 더 열렬한 공화당원인 주라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P.138)

 

공화당 내 보수 반동 세력은 대중의 눈과 귀를 교묘히 가려서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문화 이데올로기로 관심을 돌린다. 클린턴은 경제가 문제라고 질타했지만 미국 대중들에게는 진화론 반대, 낙태 반대, 동성애 반대, 유전자 복제 반대 등과 같은 사회적, 문화적 이슈가 절실히 다가온다. 사회를 좀 먹고 있는 불순한 세력과 이를 지지하는 민주당, 그들이 좌지우지하는 편향된 언론 그리고 무소불위의 괴물이 된 정부를 뒤집어엎는 게 중요하다. 경제 문제는 자연히 좋은 방향으로 해결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거에서 정의로운 공화당을 지지해야 한다는 논리다. 공화당이야말로 미국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애국 정당이다!

 

기독교 우파들의 이념적 주장들, 즉 낙태 반대, 유전자 복제 반대, 동성애 반대, 진화론 반대 등은 캔자스 주민의 대다수 삶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다. 분노에 불을 붙이고 냄비를 계속해서 부글부글 끓게 하는 구호들에 불과하다.” (P.132)

 

보수 반동 세력의 정치적 논리는 단순하지만 효과적이다. 어느 사회와 문화에서든 불건전하거나 소수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퇴폐적 요소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기성세대의 눈에 새로운 세대의 행동과 가치관은 못마땅하기 일쑤다. 사람들은 실질 보다는 이데올로기에 민감하다. 더구나 종교와 결합된 사안은 폭발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적 경험에서 질릴 정도로 많이 알고 있지 않는가. 그들은 사회의 온갖 불만의 원인을 자유주의자들에게 귀인 시킨다.

 

빨간색 주에 사는 사람들[공화당]은 스스로를 이렇게 평가한다(1). 겸손하다, 경건하다, 예의바르고 친절하며 유쾌하다, 애국자다, 언제나 정직하게 일하는 소박한 노동자다. 즉 평범하고 소박한 전형적인 미국인이다.

 

당신은 세상의 소금이며, 미국의 생동하는 심장이다......그러나 당신은 부당하고 무자비하게 박해를 당하고 있다.” (P.199)

 

평범한 보통사람들의 적, 선하고 오래된 빨간색 미국의 적은 지식인들이다. 그들은 미국 중서부를 억압적으로 지배하는 오만한 자유주의 엘리트들이다.” (P.241)

 

이제 문제는 더 이상 경제가 아니다. 도덕과 이데올로기, 문화가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슈로 자리 잡는다. 그러면 이러한 결과로 캔자스 주는 경제적으로 발전을 거듭하는 지역이 되었는가? 아니면 도덕적 문화적으로 향상된 성과를 이루었는가? 여전히 캔자스 주는 미국 내에서 경제력이 서서히 쇠퇴하는 가난한 지역 중 하나일 뿐이다.

 

도덕과 문화 변화는 기십 년 만에 성과를 기대할 수 없는 사안이다. 경제를 외면하고 문화에 주력하는 보수 반동 세력의 위와 같은 전략은 따라서 향후 지속적으로 반복하여 써먹을 수 있는 좋은 구호가 되는 셈이다.

 

보수 반동 세력이 백주에 암약할 수 있도록 방치한 민주당의 역할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오만과 방심과 욕심이 화를 자초한 셈이다.

 

(민주당은) 오랫동안 블루칼라 유권자들은 잊고 대신에 사회 문제들에 대해서 자유주의 성향을 띤 부유한 화이트칼라 전문가들을 끌어들이는 데 당의 역량을 집중했다......민주당이 그렇게 하더라도 최근까지 민주당의 강력한지지 기반이었던 노동계급 유권자들이 달리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 (P.290)

 

다만 여기서 공화당과 민주당의 역사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공화당은 애초 북부를 지지기반으로 하여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반면, 민주당은 남부를 거점으로 노예제 유지를 옹호한 과거사를 지니고 있다. 즉 공화당과 민주당의 이데올로기와 주의 전도는 미국인들에게 있어 근대와 현대 역사와 맞물려 전혀 의외라거나 생경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민주당이 중도화에 매진하지 않고 경제적 관점에서 보수 세력을 철저히 견제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저자의 주장과는 달리 민중들의 절대적 행동기준을 경제적 이해관계로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들은 때로 경제적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경제 구조나 계급적 이해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이는 인정할 수 없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한편 저자가 지적한 대로 가난한 자들이 보수 반동 세력에게 투표한다고 해서 그네들이 부유층의 이익에 위배되지만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 일은 결코 없다. 그들은 선거철에만 필요한 장기판의 졸에 불과하다. 그들의 실망과 배신감은 오래가지 못하며, 새롭지만 구태의연한 다른 이슈를 제기하면 결과는 다를 바 없다. 대다수 유권자들은 유감스럽지만 기억력이 썩 훌륭한 편이 못 된다.

 

이 정도에서 미국에서 우리네 현실로 시선을 돌리면 흥미롭다. 우리네 사회도 두 개의 미국 못지않게 분열되어 있다. 뿌리 깊은 지역 간 갈등에 계급적 이해관계의 대립, 이것이 남과 북이 대치하는 이데올로기적 특수성에 혼재되어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급격한 사회 변동에 따른 세대 갈등도 점차 두드러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사회는 근년에 들어 급격한 보수화와 우경화의 경향을 띠고 있다. 국내 보수 세력의 의도적 전략이 일부 숨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보수 우파가 지배하는 주류 언론의 성향, 선거철마다 터지는 남북 간 관계를 경색시키는 사건, 진보 세력과 소위 빨갱이에 대한 동일시 등.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수년 전 표주박에서 뛰쳐나온 망아지처럼 하루아침에 불쑥 최고통치자의 자리에 오른 이의 불행한 운명을 목격했다. 성공한 기업인 출신의 후보자를 뽑으면 국민을 잘 살게 해주겠지 하는 소박한 견해, 독재는 했지만 경제발전의 공로자에 대한 지역적, 세대적 향수의 결과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적어도 갈등과 대립의 격렬함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경우가 미국보다는 몇 수 위에 있음은 확실하다.

 

게다가 소위 진보 세력의 행보도 탐탁스럽지 않다. 그들은 매사에 따지기 좋아하고 무례한 먹물만 가득 찬 족속들이다. 그들은 자기들만 정의롭고 잘난 줄 안다. 대선토론회에서 소수파 후보자의 시종여일한 논박은 지지자들에게 후련한 통쾌감을 안겨주었지만, 보수 세력과 대다수의 중도파 부동층에게는 피로감과 불쾌감을 가중시켰다. 게다가 국회에 진출이라도 하게 되면 기존에 비판하던 집권층과 차별성을 상실하고 똑같은 놈들로 변질되고 타락하는 모습을 물리도록 목도하였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면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후보자들은 일단 당선되고 나면 일개 당을 초월하여 온 국민의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자신의 지지층의 이해와 염원에 어긋나는 경우라도 말이다. 그렇게 해서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세력이 마음을 돌려서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으로 생각한다면 지나치게 순진하다. 차라리 충실한 지지층을 더욱 결집하는 게 바른 방향이다. 제대로 된 진보가 정권을 잡은 유일한 국내 사례인 노무현 대통령의 실패는 지지자의 대통령이 아닌 국민의 대통령이 되고자 한데서 비롯된 비극적 사례다. 제아무리 중도와 온건과 보수를 표방해도 반대파는 꿈쩍도 하지 않을 뿐이며 지지층의 실망과 배신감만 유발할 뿐이다. 차라리 지지층의 기대에 부응하여 자신만의 정책 노선을 추구했더라면(한미 FTA 반대 등) 그는 후인들에게 아픔과 슬픔을 남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