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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이유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제인 구달 지음, 박순영 옮김 / 궁리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수년 전 모 방송사의 ‘느낌표’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적으로 알려진 책이다. 침팬지 연구가로서의 저자의 이력으로 기본적으로 침팬지 연구서로 추정하였다. 실제로는 제인 구달의 삶과 연구의 여정과 발견을 기술한 책으로서 저자가 침팬지 연구를 통해서 깨닫고 인간에게 제시하는 성찰과 통찰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저자는 영적인 자서전이라고 자술한다.
유명인들이 노년에 자신의 삶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그저 그런 책이 아닐까 의구심이 떠올랐다. 더구나 제인의 침팬지 연구와 아프리카 행을 어릴 적부터의 운명으로 연결 짓는 대목에서 특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초의 미미한 연관을 침소봉대하여 운명론적으로 합리화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러한 색안경은 책장을 넘김에 따라 자신의 삶과 침팬지 연구를 교차시키면서 담담하게 기술하는 문장에 서서히 젖어들면서 어느덧 사라져버렸다. 저자는 자신의 약점과 개인적 불행과 가족의 비극을 숨기거나 한치의 과장도 덧대거나 포장하지 않으면서 시종일관 스스로에 대해 겸손한 자세를 취한다.
제인이 침팬지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개방된 마음, 지식에 대한 열정, 동물에 대한 애정, 그리고 지극한 인내심을 가진 사람”이었고 “근면하고, 긴 시간을 문명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지낼 수 있는 사람”(P.86)이었기 때문이다.
책의 내용을 통해 침팬지 생태에 대한 연구의 연원이 그리 오래지 않았음과 제인 구달이 거의 시초임을 여기서 알게 되었다. 더욱이 침팬지가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는 점은 오늘날 코흘리개들도 아는 사실인데 당시에는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는 것이 오히려 흥미롭게 다가온다.
저자는 전통적 방법론에 따라 과학 공부를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찍부터 종교와 신비주의, 명상, 영적인 체험에 상당한 관심과 무게중심을 두었으며 내내 변치 않는다. 이런 점에서 초월적 객관성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전통적 과학론에서 비판을 받지만 반대로 대상은 관찰자의 감정과 태도에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낼지 아니면 감출지를 판단한다. 이것이 관찰 결과에서 커다란 차이를 좌우한다. 제인은 이렇게 기술한다.
“이 지능적인 존재들에 대해 내가 이해가고 있는 것 대개는 감정 이입을 함으로써 비로소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P.114)
이러한 제인의 입장은 우리 눈에는 지극히 동양적 관점에 맞닿아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동질감과 친밀감마저 느끼게 된다. 생명의 존재 목적과 이유, 개체를 통한 전체의 이해와 책임의 각성. 이것은 인간을 타 생물과 구분되는 상위의 존재로 설정하고 군림과 지배를 당연시하는 관점이 아니다. 타 생명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지구 생태계의 소중한 일원이다. 인간은 전혀 자신을 오만하게 여겨야 할 근거가 없다.
“물론 우리는 독특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온 것처럼 동물 세계의 다른 동물들과 그렇게 많이 다르지는 않다.” (P.278)
인간이 유인원에서 분화하여 별개의 종으로 진화한지 기껏 기백만 년에 불과하고 스스로를 우월하고 잘난 존재로 여기게 된 지 불과 수천 년 남짓하다.
제인은 아프리카 곰베에서의 생활에서 거의 완전한 만족과 행복을 누린 듯하다. 이런 평화는 항상 그러하듯이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유년 시절에 제2차 세계대전을 겪고 홀로코스트에 충격을 받은 제인은 탄자니아에서 침팬지 관찰을 하는 도중에 원치 않게 콩고와 부룬디, 르완다에서 발생한 종족 분규와 학살에 가까이 직면하게 된다.
인간이라는 종은 태생적으로 폭력성을 타고난 것인가? 이는 어떠한 수단으로도 결코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뿌리박힌 치명적인 결함인가? 침팬지를 지극히 사랑하는 제인이지만 침팬지 무리에 내재한 폭력성의 뿌리를 놓치지 않는다. 그녀에 따르면 고상한 유인원의 신화는 없다. 마음 아프지만 진실에 눈 감을 수는 없다. 폭력성은 모든 영장류의 피에 내재하는 숙명인가? 그녀는 끊임없이 자문한다.
인간은 본능을 뛰어넘어 두뇌를 악의적인 목적으로 의도하여 사용할 수 있다. 침팬지 같은 동물의 단순한 폭력적 본능과는 층위의 수준이 다르다. 인간의 폭력성과 동물의 그것과의 상이점이 여기에 있다.
책 중반부는 저자가 인간 사회의 폭력성의 원인 탐구와 이의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인간사회의 폭력성의 뿌리를 설명하는 기본 개념으로 의사종분화(pseudospeciation) 또는 문화적 종분화의 개념이 등장한다. 후자의 개념 정의가 쉬운 이해에 더 도움이 되었다.
“의사종분화란......개별적으로 습득된 행위가 특정한 집단 내에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이 지나면 이것은 그 집단의 집합적인 문화가 된다.” (P.171)
“문화적 종분화가 극단적으로 되면, 외부 집단의 구성원들을 비인간화하고, 나아가서 그들을 거의 다른 종의 구성원으로 간주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은 집단 내에서 작동하는 금지와 사회적 제재로부터 구성원들을 자유롭게 하고, 집단 내에서 허용되지 않는 행동을 ‘타자들’에 대해서는 할 수 있도록 한다. 저울의 한편에는 노예제와 고문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비웃음과 사회적 매장이 있다.” (P.172)
“불행하게도 문화적 종분화는 전세계에 걸쳐 인간 사회에서 고도로 발전되어 왔다. 선별된 내부 집단들을 만들어 민족적 배경, 사회 경제적 지위, 정치적 확신, 종교적 믿음 등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을 제외시키려는 경향은 전쟁이나 폭동, 갱 폭력, 그리고 다른 종류의 분쟁들을 야기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이다.” (P.174)
제인은 문화적 종분화가 인간의 도덕적 성장을 저해하고 사회적 평화를 방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지적한다. 이 개념으로 작금의 우리 사회를 한번 보자. 종교 대립과 지역 갈등, 학연과 혈연의 고착화, 우리와 그들의 구분. 학생들 사이의 왕따 현상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좌우 이데올로기의 충돌은 어떠한가? 문화적 소집단이 개인에게 제공하는 안전과 위안의 장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요는 동호회와 친목회가 배타적 이익집단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집단구성원의 강한 결속력을 요구하면서 집단 경계 밖의 타자에게는 차별이 당연시하도록 인지를 왜곡시킨다. 나치의 유대인 차별과 홀로코스트가 전형적인 사례다.
하지만 제인은 인간에 대하여 긍정적인 시선을 포기하지 않는다.
“절반은 죄인이고 절반은 성자인 우리 인간 영장류는 고대로부터 물려받은 두 가지 상반된 성향, 즉 폭력에 이끌리는 한편 동정심과 사랑을 느끼는 성향을 지니고 바로 여기에 서 있다.” (P.185)
“우리가 공격적인 충동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나는 정교한 지성으로써 자신이 감당해야 할 당시의 대가뿐만 아니라 장래의 대가들을 다 알면서도 희생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인간뿐이라고 확신한다.” (P.188)
제인은 도덕적 진화라는 개념에서 희망의 끈을 찾는다. 인류는 생물학적 진화만 거듭해 온 것이 아니다. 도덕적인 면에서도 본능에서 고상한 수준으로 상승하고 있다. 다만 도덕적 진화는 진전이 느리기에 생물학적 진화와 불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분명 도덕적 진화는 짧은 기간에 큰 성취를 이룩했지만 현대 사회와 같이 문화적 종분화가 극심해지는 상황에서 절실한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더 높은 수준으로의 진화는 단기간 내에 실현을 기대하기 힘들다.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지구상에 서서히 생겨나고 생존해 온 우리 인류가, 이제 덜 공격적이고 덜 호전적이며 점차 배려하고 공감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도덕적 자질들을 획득해가는 과정에 있다.” (P.239)
“우리가 도덕적 진화를 가속화하고 인간의 운명에 조금이라도 빨리 도달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우리 모두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인간 존재로부터 성인으로 진화해야만 한다. 당신과 나 같이 범상한 사람들은 성인, 적어도 작은 성인이 되어야만 한다.” (P.251)
“신을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 즉 무신론자들은 어떠한가? 내 생각에는 다를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간성에 봉사하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과 존경으로 대하는 삶이야말로 성자와 같은 행동의 정수인 것이다.” (P.254)
“나는 우리 인간들이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도덕적인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나도 잘 알고 있듯이,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래서 나는 단지 한 사람 한 사람이 조금씩이라도 더 성인다워지도록 노력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P.255)
제인은 인간이 작은 성인이 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개개인이 도덕적으로 뛰어난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할 때 도덕적 진화는 앞당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그녀의 어조는 차라리 종교적이다.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비관적 전망과 희망의 기대가 엇갈려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실적인 차원에서 실행가능성이 높은 것은 차라리 동물 학대 금지와 존중이라는 인도적 방책의 추구라고 하겠다. 제인은 궁극적으로 동물 실험을 없앨 것을 주장하며, 채식까지는 나아가지 않더라도 비인도적 환경에서 양육되는 동물들의 처지를 개선하고자 애쓴다. 그것은 동물들뿐만 아니라 (불가피하게 육식을 해야만 하는) 인간 자신의 온전한 생존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그녀도 현실이 녹록치 않음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운명의 시간은 가속적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들의 대응은 미적지근하기 그지없다. 자칫하면 인간이라는 종은 자신들만 그치지 않고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와 함께 동반자살을 감행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변화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여전히 품는다.
“내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네 가지이다. 인간의 두뇌, 자연의 회복력, 전세계 젊은이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또 타오르게 할 수 있는 에너지와 열정,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굴의 인간 정신이 그것이다.” (P.289)
바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기독교의 사도가 된 것처럼 제인 구달은 시카고 학술대회를 계기로 침팬지 연구가에서 동물보호론자, 나아가 환경보호론자 및 문명비판가로 변모하였다. 자신이 사랑하는 침팬지 종의 생존을 보호하는 길은 우리 인간과 사회, 문명의 전반적 반성과 개선이 없으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달았던 것이리라. 또한 우리 인간이 스스로 각성하지 않는다면 나아가 인류의 미래마저도 밝지 않으리라는 사실도 제인은 꿰뚫어보았다.
제인의 변모의 배경에는 생명에 대한 사랑이 기저에 자리잡고 있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남도 사랑할 수 있다.
“우리가 사랑해야만 하는 ‘자신’은 우리의 자아도 아니고, 아무 생각도 없이 이기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불친절하게 행동하고 돌아다니는 일상인도 아니다. 우리 각각의 내면에 있는 창조주의 일부인 순수한 영혼의 불꽃, 즉 불교도들이 ‘핵’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P.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