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 - 굳게 닫힌 연인의 마음을 여는 열쇠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4
제인 오스틴 지음, 조희수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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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제인 오스틴에게,

 

어느덧 당신을 만날 수 있는 마지막 때가 다가왔군요. 당신의 글을 통해서 심오한 사상의 무게와 현학적인 문구의 더께에 짓눌려 문학과 책읽기의 즐거움을 새삼 깨닫게 된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일상 속의 진리, 평범 속의 비범이라는 문구는 다소 상투적이지만 그래도 제 심경을 비교적 온전히 전달해주는 표현입니다.

 

이 소설은 당신의 완성된 작품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집필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40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만큼 초기작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를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확실히 그렇게 보입니다. 작가 자신의 모습이 짙게 투영된 작품이라고 하면 오독일까요? 주인공의 나이 설정에서 확연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작중 앤의 나이는 27세입니다. 이전 당신 작품 속 여주인공의 나이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을 벗어나지 않았지요. 그건 당시 여성들의 결혼 적령기를 반영하고 있어서입니다. 그래서 한 작품에서는 여성의 나이가 20대 초반에 이르자 여성의 엄마가 안절부절 못하는 장면도 나타나지요. 그렇다면 앤은 당대 기준으로는 노처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정도라면 30대 중반 정도? 한 평생 독신으로 지낸 당신으로서는 꽃다운 나이의 여성에게만 사랑과 결혼의 행복을 안겨주기에 싫증이 났던가요 아니면 불현 듯 자신의 체험을 통해 적령기를 벗어난 여성에게도 배려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앤은 첫사랑과 결혼에 실패하였습니다. 주변의 반대가 심한 까닭에 당시 어린 그녀는 이를 감내할 용기가 부족했지요. 덕분에 그녀의 전성기는 빠르게 지나가고 말아서 이제는 시들고 야위어 버린 상태가 되었습니다(P.13). 지금의 그녀라면 과거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만일 그 당시의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젊은 사람으로부터 조언을 부탁 받는다면, 장래의 불확실한 행복을 위해 현재의 고통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P.44)

 

여기서 앤의 성품을 되짚어봅니다.

 

마음씨가 곱고 성격이 온화해서 진정으로 남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들로부터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말이다.” (P.13)

 

남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녀 특유의 상냥함과 품위는 곧 효력을 발휘해서......” (P.137)

 

앞의 회한과 위의 성품을 통해 독자는 앤이 드물게 보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갖춘 여성임을 알게 됩니다. 그녀의 가족인 엘리엇 가문의 다른 구성원에게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자질이지요. 앤은 어릴 적 자신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후에 웬트워스와 사랑을 재확인하고 결혼을 진행할 때 단호한 결정을 내린 것은 당연합니다.

 

앞선 작품들과 구분되는 특징의 또 하나는 소위 가문에 대한 집착의 경시와 행복한 가족의 요건에 대한 당신의 뚜렷한 주장입니다. <오만과 편견>에서 다아시의 주저와, <엠마>에서 엠마가 강조했던 신분과 가분에 대한 강한 의식은 여기서 희화화됩니다. 앤의 아버지인 월터 엘리엇 경이 준남작 명부만 꺼내 읽는 소설의 첫 대목이 이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내면에는 눈과 귀를 닫은 채 오로지 껍데기뿐인 작위와 가문만을 따지는 당대의 관행에 일침을 가하고 있지요. 앤이 그나마 긍정하는 것은 내실과 품위가 뒷받침되었을 경우의 가문일 따름입니다.

 

그녀는 신분이나 친족관계 문제에 대하여 대체로 하찮게 여기고 있지요(P.204). 오히려 그녀는 가족들이 한수 아래 낮추어보는 머스그로브 가족에게서 참된 가족의 모습을 찾고 있습니다. 앤은 자신의 집안에서 무관심과 냉대의 대상입니다. 가족 간에 애정이 없기 때문이죠.

 

집안에서 그녀의 말은 무시당했으며, 그녀의 편의는 언제나 맨 마지막으로 고려되었다. 그녀는 그저 앤에 불과했던 것이다.” (P.13)

 

그럼 앤은 여기 머물러 있는 편이 낫겠구나. 바스에서는 앤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을 것 같으니까.” (P.49)

 

이건 진심입니다. 앤은 부인과 비교할 때 저에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P.199)

 

이런 그녀에게 있어 아웅다웅 하지만, 전적으로 애정과 신뢰에 기반을 둔 머스그로브 가족에게서 부러운 화목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앤은 갑자기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탐탁지 않고 불편하더라도 모든 일은 같이 알고 행해야 한다는 것, 그게 바로 머스그로브 가의 오래된 관습이었던 것이다.” (P.115)

 

앤과 웬트워스 간 관계의 회복과 진전에 대한 장밋빛 암시는 오랜만의 재회 및 상면 장면부터 등장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행복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웅크리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P.85)

 

두 연인이 사랑이 식어서 헤어진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외부적 여건에 의해 장기간 이별상태에 놓였다가 재회하게 됩니다. 두 사람 모두 아직 결혼하지 않은 채 그대로입니다. 이때 두 사람의 심경은 그새 애정이 식었든지 아니면 재 속의 불씨처럼 계기만 있으면 활활 타오르지 않겠습니까. 처음엔 어색하고 서먹서먹하겠지만 상대방의 마음이 여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달라지겠죠. 웬트워스의 태도처럼 말입니다. 그의 가슴 속은 깊디깊은 회한으로 가득합니다.

 

저는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굳건하게 지키라는 겁니다.” (P.121)

 

그는 사랑을 두려워합니다. 친구인 벤윅 대령의 사랑에 빗대어 진실한 사랑의 절대성을 다음과 같이 옹호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깊고 지순한 사랑이 그리 쉽게 포기될 수 있는 거죠? 무언가 잘못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웬트워스가 듣게 된 앤의 진실한 사랑관은 웬트워스 자신의 것과 판박이와 같습니다. 다음의 말을 듣게 된 웬트워스가 앤의 진심을 알게 되고 사랑의 감정에 자신을 맡기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겠죠.

 

분명히 여자들은, 남자들이 여자를 잊어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남자를 잊어버리지 못합니다. 그것은 여자들의 미덕이라기보다 운명이에요.” (P.322)

 

남자들은 분명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거나 소중한 대상이 있을 때 자기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보호하고자 하겠지만, 여자들은 그 대상이 사라진 후에도 사뭇 오랫동안 잊지 못하고 가슴속에 간직해 둔다는 거죠.” (P.326)

 

이전 작품들에서 미스 제인 오스틴 당신은 다소간 우여곡절은 있지만 만남에서 결혼까지 멈춤 없는 사랑의 과정을 전개하였습니다. 읽는 이로서는 매우 흐뭇한 일이지만 사실 이상적인 연애와 결혼의 단계라고 하겠습니다. 실제 남녀 간의 사랑에는 굴곡이 존재합니다. 사소한 견해차가 나비효과를 발휘하여 이별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이 작품에서 당신은 단절된 사랑의 재결합을 다룹니다. 신분과 재산의 격차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 헤어졌음에도 잊지 못하고 결국 합치게 되는 사랑. 이것은 공상적이지만 오히려 더욱 현실적이기도 합니다. 사랑에는 기쁨보다는 더 많은 슬픔과 괴로움이 존재합니다. 그러기에 사랑을 노래한 많은 예술가들이 행복한 연인의 얼굴에 눈물을 그리는 게 아닐까요?

 

남성도 그러하지만, 여성에게 있어 사랑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앞서 앤의 미모의 절정기는 금세 지나가서 쇠락한 모습으로 보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앤이 웬트워스를 의식하면서 아름다움을 되찾아 새벽이슬을 머금은 청초하면서도 눈부신 자태를 가진 여성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아침바다의 상쾌한 바람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눈에는 생기가 넘치고 얼굴에는 싱싱함이 가득 고여 있었다. 단정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은 마치 예전의 앤 엘리엇의 잔영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고 있었다.” (P.143)

 

남녀 간 애정사를 포함하여 사람 간의 진실한 관계는 외풍에도 흔들림 없는 단단한 사랑과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그것은 시작인 동시에 끝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설득>에서 제가 발견한 삶의 미덕이랍니다.

 

이제 미스 제인 오스틴 당신과 헤어질 때가 되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작품을 다룬 책을 읽어볼까 했지만 부질없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습니다. 웬만해서는 재독을 하지 않는 성향으로 당신 소설들을 다시 읽을 가능성도 희박합니다. 즐겁고 아름다운 추억은 가슴 속에 묻어둘 때 더욱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저도 당신과 당신이 창조한 인물들의 기억과 상념을 품에 안은 채 여기서 작별 인사를 합니다.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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