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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생거 사원 - 다른 세상으로 나 있는 창문을 보여주는 ㅣ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5
제인 오스틴 지음, 신미향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6년 12월
평점 :
미스 제인 오스틴에게,
겨우 마흔을 넘어 불귀의 객이 된 당신의 작품들 가운데 유작으로 출판된 작품이 <노생거 사원>과 <설득>이지요. 이 둘은 집필된 시기를 보면 사실 매우 커다란 간극을 보여주는데, 전자는 처녀작 또는 습작이라고 해도 무방한 반면, 후자는 거의 말년에 쓴 작품이니까요.
제가 예전에 쓴 당신의 소설들에 대한 촌평을 보면 알겠지만, 초기에는 당신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제한된 배경과, 반복되는 소재, 그리고 유사한 구성에 이르기까지, 물론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와 반짝이는 문체는 평가하지만요. 수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점차로 당신의 작품들에 빠져들게 되었답니다. 우리에게는 한 명의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만 필요합니다. 제2, 제3의 세르반테스는 달갑지 않습니다. 프루스트와 조이스도 마찬가지겠지요. 이런 면에서 미스 제인 오스틴, 당신도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할 만합니다. 상투적이라는 말은 곧 보편적임을 가리키지요. 상투적이지만 진부성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드는 솜씨는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든지 희노애락의 표현에 마음을 열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이 소설을 당신의 후기 걸작들과 나란히 놓고 비평한다면 지나치게 가혹한 행위이겠지요. 당신의 정교한 개작의 손길을 얻을 기회를 갖지 못한 작품이니까요. <노생거 사원>은 사실 대가 제인 오스틴의 풋내기 시절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싱싱한 날것의 묘미를 느낄 수 있지요, 훗날의 프로페셔널 소설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어설프고 설익은 듯하지만 과감한 도전정신으로 충만하고, 소녀적 감성이 깃들어 있으며 확고한 자기주장도 펼 줄 아는 그런 당신의 윤곽이 작품 내에 어른거립니다.
작중 여주인공 캐서린은 나이에 비해 올바른 사리분별을 갖춘 모범적인 아가씨로 묘사됩니다. 이는 친구였던 이사벨라의 숨겨진 경박성과 두드러진 대조를 보이는 미덕이기도 합니다. 그런 캐서린의 유일한 약점은 고딕 기담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경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래드클리프 부인의 우돌포에 홀딱 정신이 빠져든 장면이 작중에 기술될 정도니까요. (이 장면을 통해 보면 당신 역시도 고딕 기담에 제법 관심이 없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캐서린이 노생거 사원에 머물게 되면서 증세는 더욱 심해집니다.
“상처 입은 불행한 영혼의 수녀에 대한 끔찍한 기록들과 오래된 전설을 살펴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한껏 부푼 가슴을 가라앉히기가 힘들었다.” (P.173)
자신이 머물게 된 방구석에 놓인 커다란 상자를 여는 대목, 역시 방에 놓여있던 아주 오래되고 커다란 옷장의 서랍에서 발견한 종이 뭉치 에피소드, 이렇게 그녀의 공상과 상상은 증폭되다가 종내에는 틸니 부인의 방에서 뭔가 끔찍한 범죄의 흔적을 찾으려는 모험으로 이어지지요. 그러다가 틸니 씨와 딱 마주치게 되지요.
“몰랜드 양,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겁니까?” (P.247)
위의 질타는 고딕 기담에 매혹되어 정신을 잃은 모든 독자를 향한 선승이 내려치는 죽비의 일타와도 같은 것입니다. 캐서린도 환한 대낮에는 간밤의 자신의 행동이 터무니없음을 깨닫지만 어찌할 수 없는 호기심에 이끌려 순간적으로 이성이 흐려지게 된 것입니다.
“어제 한 상상들은 그야말로 너무 어리석은 내용이었다. 이렇게 현대적으로 잘 꾸며 놓고 항상 사람이 드나드는 방에서 이상한 내용의 종이가 발견되지 않은 채로 있었다고 상상한 거나 누구라도 열 수 있도록 열쇠까지 마련되어 있는 옷장을 자신이 처음으로 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P.215)
“생각은 아직 그런 근거 없는 공포로 인해 느끼고 행동했던 일들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그 모든 생각이 자위적이었고 스스로 만들어 낸 공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건 너무도 자명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을 중요한 것으로 지레짐작해 받아들이고 사원에 도착하기 전부터 두려움이나 공포를 갈망하고 있었던 탓에 모든 일을 왜곡해서 받아들인 것이다.” (P.249)
그래도 캐서린 정도나 되니까 이쯤에서 올바른 각성을 했다고 봅니다. 당대에 고딕 소설에 푹빠져 헤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무척 많았으며 이들에 대한 경종의 의미도 당신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한편 바스에서 만난 소프 남매는 당시 최고의 행운으로 치부하였으나 훗날 되돌아보면 만나서는 안 될 사람들이었음이 드러나지요. 그들은 자신들만 아는 “인색하고 이기적인”(P.121) 사람들로서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해서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개념이 전혀 없음이 클리프턴 소풍을 캐서린에게 강요하는 대목에서 극적으로 노정됩니다. 이 대목에서 착잡한 심경이 드는 이유는 현대에도 이런 부류가 사회의 주류로 득세하고 있음에서입니다. 이들은 교묘한 언변과 흠잡을 데 없는 예의범절, 그리고 뛰어난 사교성으로 존경받을 사람인 것처럼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타인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밟고 올라서거나 이용할 대상에 불과합니다. 만면에 미소를 짓고 부드러운 말솜씨와 세련된 태도로 상대하다가 한순간에 냉혹한 표정으로 찬바람 나게 등을 돌려버리고 마니까요.
절체절명의 순간에 캐서린의 과단성과 확고한 분별력이 빛을 발합니다.
“그래도 가야겠어요. 지금 어디에 있든 가서 만나야 해요.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제 판단으로 잘못된 일을 하도록 설득당하지 않아야 잘못된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거라고요.” (P.125)
이 대목은 그녀의 두드러진 미덕을 보여줌으로써 소설 주인공으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음을 나타냄과 동시에 그녀와 소프 남매와는 더 이상 화해가 불가능한 관계의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음을 웅변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노생거 사원>은 이밖에도 흥미로운 특징을 더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당신의 의도인지 아니면 미숙성의 반영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다른 데서 찾기 어려운 색다른 재미라고 하겠습니다. 먼저 당신의 소설 옹호론을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습니다. 당대 비평가들의 근시안적인 졸렬한 비평과 독자들의 위선적인 이중적 태도를 함께 비판하고 있지요. 작가인 당신은 이렇게 항변합니다.
“우린 상처 입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내놓은 작품들이 세상 그 어떤 분야의 작품보다 열렬하고 진솔한 찬사를 받을 가치가 있지만, 지금까지 소설만큼 많은 비난을 받은 분야는 거의 없다.” (P.38)
또한 독자들은 이 소설에서 작가의 직접적 개입과 어조를 곳곳에서 접할 수 있습니다. 역시 다른 작품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징입니다. 작가는 인물들이 전적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작가는 캐서린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꾼 또는 변사의 역할을 자처합니다. 필요할 경우 흐름을 잠시 멈추고 자신의 의도와 판단을 독자에게 직접 밝힘으로써 작품 전개와 독자의 이해를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려는 것이 당신의 의도라고 이해됩니다만.
“다음 페이지부터 시작될 바스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과 모험으로 들어가기 전에, 독자들이 주인공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캐서린의 성격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P.12)
“그렇다, 소설! 필자는 자신들이 창작해낸 바로 그 작품을, 스스로 경멸을 섞어 비난하는 일부 소설가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인색하고 졸렬한 태도는 결코 취하지 않을 것이다.” (P.38)
“그렇지만 내 소설은 완전히 다르다. 나의 주인공은 혼자서 치욕스러운 모습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도저히 행복한 분위기를 묘사할 수 없는 상황이다.” (P.292)
제인 오스틴 양, 이 소설은 이미 서두에서 밝혔듯이 후기 작품들에 비하면 분명히 어설픈 점이 존재합니다. 구성과 문체 면에서 보이는 약점을 굳이 옹호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그것이 이 작품의 매력을 반감시키지는 못합니다. 남성 주인공 틸니 씨의 개성이 분명하지 못한 가운데서도 독자는 나이어린 캐서린이야말로 뚜렷한 독자적 개성을 지닌 인물임을 발견할 수 있지요. 여기에 후기작들에서는 볼 수 없는 작가인 당신의 적극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도 하나의 흥밋거리를 제공해 줍니다.
당신은 때 이른 죽음으로 미처 초고를 손질하지 못했다고 저세상에서 아쉬워하거나 자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체로서도 이미 충분히 아름다운 가작이니까요. 비제의 유일한 교향곡과 슈베르트의 초기 교향곡들이 후세인들에게는 베토벤과 브루크너, 말러의 대작 못지않은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작품들로 인정받고 있음을 상기하세요. 아, 멘델스존의 초기 현악 교향곡들도 마찬가지군요.
잠시 후면 마지막으로 <설득>을 만나러 가야 할 시간입니다. 조만간 다시 글을 띄우도록 하지요.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