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
시마자키 도손 지음, 노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작품명을 보고 섣부른 판단을 하였다. 종교적 소재를 다룬 작품이겠거니 나아가서 종교에서 매우 민감한 파계 사유라면 남녀 간의 정욕에 관련된 것이 아니겠는가. <파계>는 훈계-아버지의 엄한 유훈-를 깨뜨린다는 의미였다.

 

전근대사회와 근대사회를 구분 짓는 특징 중 하나는 계급제 즉, 신분제의 철폐에 있다. 조선시대의 양반, 평민, 천민, 일본의 사무라이, 상민, 천민 등의 신분적 차별은 근대화를 선언하는 도상에서 명목상 폐지되었다. 하지만 이는 명목에 불과하였다. 수백 년, 아니 수천 년간 지속되었던 신분 질서가 하루아침에 소멸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어불성설이다. 우리나라에서 족보를 신뢰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다. 족보만 보면 우리는 모두 당당한 왕족 내지 양반 가문의 후손들이다. 자신의 조상들이 천민은커녕 평민이라고 밝히는 가문을 아직 본 적이 없다.

 

주인공 우시마쓰는 백정의 아들이다. 조선시대에도 백정은 천민 중에서도 그야말로 최하층이었다. 일본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신분철폐령에 따라 법률적으로는 평민이 되었지만 사회적으로는 기존 평민과 구별되는 신평민으로 분류되었다. 우시마쓰는 신분상승을 꿈꾸는 아버지의 노력 덕택으로 주위에 알려지지 않은 채 사범학교를 다니고 모범적인 초등교사 생활을 하게 된다.

 

그 역시 내면에 계급에 대한 강렬한 자의식을 품고 있다. 보통 사람들의 신평민에 대한 아무렇지 않게 내던지는 멸시와 모욕적 언사, 그것은 그에게 개개가 화살처럼 가슴에 꽂혔다. 차라리 교육을 받지 않았으면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고등교육을 받은 그는 지식과 이성을 통해 각성한 자아와 배치되는 현실 사이에서 치열한 갈등과 고뇌를 겪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나도 사회의 일원이다. 나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살아갈 권리가 있는 거야.” (P.66)

 

왜 신평민만 그렇게 천대받고 치욕을 당하는 것일까? 왜 신평민만 보통 인간에 낄 수 없는 것일까? 왜 신평민만 이 사회에서 살아갈 권리가 없는 것일까? 인생은 무자비하고 잔혹한 것이었다.” (P.303)

 

지금에 와서는 지극히 당연한 발언임에도 그것이 새삼스레 여겨지는 것은 당대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음에 비추어서이다.

 

작가는 주제의식을 초반에 분명히 설정되어 있음을 독자에게 알린다. 독자는 이미 알고 있다. 우시마쓰는 자신의 신분을 공개할 것이다. 요는 그 시기가 언제쯤이며,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어떤 갈등을 겪는지가 관심의 대상이다. 자칫하면 지루하게 늘어질 우려도 있기에 전개 과정에서 독자가 긴장과 흥미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하는데 작가의 역량이 판별될 것이다.

 

우시마쓰는 파계를 감행하고 싶다. 비밀을 숨기는데 따른 심적 불편과 정서적 불안을 감내할 정도로 담대하지 못하다. 작품에서는 우시마쓰의 두려움과 괴로움이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파계를 할 경우 그는 두 가지 두려움을 감수해야 한다. 신분이 공개됨에 따라 자신이 가르치는 학교를 그만두어야 할 것이며, 전혀 다른 데서 밑바닥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점차로 은근히 깊어가는 오시호에 대한 관심도 단절될 것이 분명하다. 한편 파계는 아버지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다. 아버지가 무슨 연유로 만근의 훈계를 명령했는지 잘 아는 처지에서 더구나 인륜의 관점에서도 이를 거스르는 것은 쉽지 않다.

 

너는 아비를 버릴 셈이냐.” (P.166 )

 

여기서 또 하나 아버지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작가의 문제 제기가 존재한다. 파계는 육친의 아버지와 정신의 아버지 간의 선택에 대한 갈등의 사안이다. 생물학적 아버지는 수치스러운 혈연을 숨기기 위해 필사의 노력과 희생을 무릅쓴다. 정신적 아버지는 신평민임을 숨기지 말고 당당히 세상의 편견에 맞서 싸우라고 요구한다.

 

우시마쓰가 도살장에서 정신적으로 방황을 거듭하는 장면(P.166)은 이러한 갈등의 한 정점이다. 렌타로의 지적 세례를 받은 우시마쓰는 렌타로의 주장에 깊은 공감을 하면서 그를 추종하고 적어도 그에게만은 자신이 그와 같은 계급임을 밝히고 싶어 한다. 양자 사이의 팽팽한 입장 차이가 작품 전체에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우시마쓰의 신경을 서서히 갉아먹는 구실을 하고 있다. 우시마쓰가 세 번이나 렌타로를 모르는 사람처럼 부인하는 대목(P.219)은 흡사 베드로가 예수를 부정하는 성서의 장면을 연상시킨다.

 

렌타로를 향한 우시마쓰의 숭배는 동일한 계급 출신이라는 차원을 떠나 그가 주장하는 인간답게 살고 대접받을 보편적 권리에 대한 이성과 감성 차원에서의 절대적 동의에 근거한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미성년일 때 아버지와 가족의 울타리와 보호 아래서 양육되던 우시마쓰는 이제 울타리가 속박으로 여겨진다. 울타리 밖은 거칠고 잠재된 위협이 도사린 미지의 세계이지만 언제까지나 이곳에 머물 수는 없다. 렌타로는 외부세계의 훌륭한 사표였다.

 

우시마쓰는 눈과 서리 아래서 싹튼 어린 풀이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의심과 두려움으로 닫혀버려 안쪽의 생명이 발달할 수가 없었다. 눈과 서리가 해를 맞아 녹는 것에 무슨 이상함이 있으리. 젊은이가 마음이 가는 선배 앞에 경모의 정을 바치고 활발하게 전진하는 데 무슨 이상함이 있으리.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우시마쓰는 렌타로에게서 감화를 받고 정신의 자유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P.153)

 

우시마쓰는 렌타로의 죽음에 불현 듯 각성한다. 신분을 숨기고 노심초사하는 삶은 거짓의 삶’(P.319)이라는 사실을. 진실한 자신을 속이고 가면 뒤에 숨어 있는 삶은 결코 생의 참된 행복을 기대할 수 없다. 양심에 당당하고 세상의 편견을 질타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야말로 사회를 나아가게 하는 추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출발은 처절한 자기 고백에서 시작해야 한다.

 

정말로 나는 백정입니다. 조리입니다. 불결한 인간입니다.” (P.336)

 

한편 작가는 우시마쓰를 둘러싼 여러 인물군상을 소개하면서 사회 내에 팽배한 부조리와 그릇된 전근대적 인식이 당대에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있는지를 알려준다. 신분질서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은 제법 합리적인 인간으로 표현되는 우시마쓰의 친구인 긴노스케도 피해갈 수 없다.

 

신평민이 아름다운 사상을 가질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도저히 안 들잖습니까. 하하하.” (P.54)

 

백정은 일종의 특이한 냄새가 있다고 하는데, 맡아보면 알 수 있지 않겠나?” (P.284)

 

게다가 사회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성질이 아주 삐뚤어져 있지. 그런 신평민 속에서 남자답고 똑똑한 청년이 나올 리가 없어. 어떻게 그런 패가 학문이라는 방면에 고개를 들 수 있겠나.” (P.284)

 

비열한 성격을 가지고 이상하게 비뚤어진 말만 하는 것이 하등인간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주제넘게 사회에 참견하고, 그런 사상을 가진 것부터 잘못이야. 그 선생 따위에게는 가죽이라도 만지작거리면서 온순하게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 참으로 어울리는데!” (P.292)

 

더욱이 교육계는 가장 깨끗한 곳이어야 함에도 당대에도 그러하지 못하였다. 작품 중에서 대표적인 부정적 인간형으로 묘사되는 교장과 분페이, 군 장학관의 삼각관계가 두드러진다. 학교를 자신의 권력욕이 지배하는 곳으로 만들려는 교장과, 정치에 의지하여 출세를 도모하려는 분페이의 이해관계는 딱 맞아떨어진다.

 

지방에 와서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의 첫 번째 요건은-다름이 아니라 이 교장처럼 세속적인 마음가짐이다......현명한 교육자는 언제나 지방회 의원과 결탁하여 제자리를 굳게 다지기를 꾀하는 것이 보통이다.” (P.24)

 

교장의 비교육자적 처사는 우시마쓰를 배웅하려는 학생들을 결석계도 안 내고 무단으로 등교하지 않는다며 반강제적으로 소환하는 데까지 이른다. 작가는 탄식한다.

 

, 교육자가 교육자를 꺼린다. 동료로서 질투하고, 인종으로서 경멸하고-세상을 태우는 불꽃은 출발 순간까지 우시마쓰의 신상을 쫒고 있었던 것이다.” (P.365)

 

결국 시마자키 도손은 <파계>를 통해 바람직한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가로막는 구시대적 악습과 편견, 사회적 부조리를 일거에 고발하고 있다. 그것은 안으로는 근대적 개인의 성장에 장애가 되는 가족제도와 아울러 종내에는 개인의 양심이라는 도덕적 차원으로 귀결되는 사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이 당대 일본 문단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던 사유는 사람들이 숨기고 싶었던 문제, 혹은 미처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했던 죄악을 전면에 내세워 통렬한 반성을 요구함에 있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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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584 2014-06-23 0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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