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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 외 7편 ㅣ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14
시마자키 도손 지음 / 소화 / 1996년 2월
평점 :
<수록 작품>
1. 애비
2. 쓰가루 해협
3. 가축
4. 세 여자
5. 성장 준비
6. 폭풍우
7. 식당
8. 분배
시마자키 도손은 일본 근대문학사에서 자연주의 사조를 확립시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대표작은 <파계>이며, 문학동네에서 번역본이 나와 있다. 워낙 이 작품이 유명하여 다른 그의 작품들은 가려버린 느낌이지만 애초 그의 문학적 출발은 시인으로였으며 낭만주의 시작으로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파계> 외에 국내에 출간된 작품으로는 이 단편집과 또 다른 장편인 <봄> 정도이다.
이 책은 도손의 단편 중에서 초기의 세 편과 후기의 다섯 편을 수록하였다. 옮긴이는 도손이 쓴 단편의 맛을 고루 음미하기 위하여, 그의 처녀 단편집과 마지막 단편집에 실린 단편을 고루 배열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초기작들은 운문에서 산문으로 전향하여 자신만의 글쓰기 양식을 아직 확립하지 못한 자취가 역력하다. 자연주의라는 이념에 지나치게 충실하기 위하여 비일상과 파격의 사건을 소재로 택하고 있다. 남김 없는 삶의 재현이 일상의 삶을 외면하라는 의미는 아니었을 텐데.
<애비>에서 작가는 분명 인간 성욕의 억누를 길 없는 분출과 도덕적 판단의 헛됨을 그리고자 했을 것이다. 오시마의 아들 미사오의 애비는 누구란 말인가? 숙부, 화자인 나, 스나가, 헌 옷 장수, 아니면 요시돈. 남녀의 사귐이 들꽃과 꿀벌처럼 자유분방함이 자연스럽다는 작가의 주장이 심금에 닿지 않는 연유는 역시 윤리적 잣대를 치울 수 없기 때문이다.
<쓰가루 해협>은 아들의 자살로 충격을 받은 부인을 위로하고자 떠난 선상 여행이 배경이다. 혼슈와 홋카이도를 나누는 쓰가루 해협, 러일전쟁의 위태로운 상황, 아들을 닮은 서생의 만남과 헤어짐. 한때의 우연한 에피소드일 따름이다.
<가축>은 버림받은 암캐의 살고자 하는 자연적 본능과 사랑스럽지 못한 외모를 이유로 개를 박대하고 없애려고 하는 인간의 무자비하고 잔혹한 속성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새끼를 낳은 그날 아침 ‘그 놈’은 처음으로 인간에게서 구박이 아닌 말과 행동을 보게 된다. 이후 ‘그 놈’의 형편은 역전될 것인가? 그렇더라도 깨지기 쉬운 불안한 평화와 행복일 것이다.
소재는 물론 구성과 문장의 호흡도 퍽퍽하여 그다지 뛰어난 인상을 받지 못해 명성에 비하여 대체로 범작인가 의구심을 가졌을 때 반전을 가져온 것이 후기 작품들이다. 거의 이십년에 가까운 시간적 경과는 도손의 개인적 삶은 물론 문학세계에도 커다란 변모를 가져왔을 것은 불문가지다.
<세 여자>는 온천 요양 온 미쓰코를 중심으로 여학교 동창들인 모모코와 다에코의 세 여자의 인생의 행로를 담담히 그리고 있다. 그녀들은 교육받은 소위 신여성들이다. 미쓰코는 또 다른 친구 나쓰코와 잡지 발행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녀들은 지적인 면에서는 새로운 시대를 추구하지만, 정서적 면에서는 아직 구시대에 끈을 드리우고 있다. 그녀들 중에서 삶에 좌초하거나 전통에 타협해서 아니면 가정의 꿈에 젖어서 가려던 길에서 벗어날 이들도 적지 않다. 남은 이들도 자신의 길에 대한 확신과 각오를 품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는 모든 남녀 성인들에 해당되지만, 당대 신여성에게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물음이리라.
“미쓰코는 깊은 혼돈의 안개에 닫혀져 있는 사람은 자신뿐 아니라, 모모코와 같은 친구조차도 마찬가지로 저물기 쉬운 저녁과 같은 청춘의 한때를 오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P.64)
문득 자신과 주위를 되돌아보면 감상과 회한에 빠져들게 된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처지에 빠진 자신. 그것은 모모코가 가르치는 여학교를 방문하여 보게 되는 “고엽으로 바뀌기 전의, 싱싱한 생명의 반짝임”(P.77)으로 넘쳐나는 어린 학생들과는 대조적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감상과 비관으로 가라앉지 않는다. 현실을 인지하지만 현상에 주저앉지 긍정적으로 수용하려는 태도. 그래서 미쓰코는 ‘다시 한 번’ 도쿄로 돌아가려고 한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놓지 않는 삶에 대한 한 조각의 긍정, 그것이 도손의 후기 작풍의 특징일지도 모른다고 섣부르게 추론한다.
“자신 속에 있는 것은 빈약함뿐이다. 그러나 이 약한 자신의 힘으로 갈 수 있는 곳까지 가자. 가령 어떤 작은 것이라도 끝없는 힘으로 보살핌을 받고 있음을 믿고 가자.” (P.79)
딸을 키우는 홀아비 아버지는 어느 순간 벽에 부딪힌다. 이전까지 아빠의 기쁨이자 공주님이며 인형이었던 딸은 더 이상 없다. 내심 인정하기는 싫겠지만 딸이 여인으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딸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 어린아이와 어른의 도상에서 혼란스럽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성장 준비>에서 다루는 세계가 이것이다. 지금이라면 별다를 게 없겠지만, 당대로서는 이것조차도 조심스러운 소재였을 것이다.
1923년의 관동대지진은 일본인들의 삶과 정신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이에 비견될 만한 자연 재해는 사후 여파란 면에서 2011년의 동일본 지진과 해일 정도가 아닐는지. 대지진 전후를 배경으로 과거의 전통과 단절하고 새로이 출발하는 세대와 이를 씁쓸하게 지켜보는 기성세대의 대비를 보여주는 게 <식당>이다. 지진 전 고다케 상점 주인의 딸로서 후에는 마님으로서 평생을 보내온 오미와는 아들이 상점을 되살려주길 고대한다. 아들은 대지진을 통해서 인정 세파의 무쌍함과 덧없음을 알아차렸다. 과거에 안주하고 뒤돌아본다는 건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바람직스럽지도 않다. 고통스러울지라도 눈을 전면으로 향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비록 어머니 오미와가 서운해 할지언정. 고다케 상점의 회복은 반문마냥 그에겐 불가능한 꿈에 불과하다.
“아직 어머니는 그런 꿈을 꾸십니까?” (P.161)
자신이 익히 알던 도쿄는 고다케 상점과 더불어 영영 과거의 기억으로 묻혀버리게 되었음을 오미와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형언할 수 없는 쓸쓸함...
<분배>와 <폭풍우>는 유사한 배경을 공유한다. 넷이나 되는 아이들, 일찍 아내를 여위고 홀로 아이들을 키우는 작가인 화자.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첫째와 화가 지망생인 둘째, 그리고 막내는 딸아이라는 점도. 필경 일정 부분은 작가 자신의 실생활에서 차용했음을 짐작케 하여 묘한 동질감마저 느끼게 한다.
어른이 나이 들어 쇠약해지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면, 철부지 아이들이 어느덧 훌쩍 자라서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매진하기 위하여 보금자리를 떠나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부모 입장에서는 기특하고 대견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허전하고 씁쓸한 여운이 남지만 어쩔 수 없다.
<분배>의 화자는 생각지 못한 뭉칫돈이 생기자 이의 처리를 두고 잠시 고심한다. 저축을 하여 노년의 여생을 대비할 수도 있지만, 화자는 자식들이 각자의 장래를 위한 든든한 노잣돈으로 분배하기로 결심한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 아닐까? 자신들의 근검과 희생은 본인들의 성공과 행복만을 위한 게 아니라 자식들이 더 나은 여건에서 행복해질 수 있도록 바라는 것 말이다. 자신들에 대한 생각은 언제나 뒷전이다. 화자의 담박한 언명과도 같이.
“내 앞에는 아직 조금밖에 들여다보지 않은 노년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여기까지 데리고 온 네 자식들을 위해, 무엇인가 각자 도움이 될 날이 오리라고 생각하고 긴 여행 도중의 길가에서 생각지도 않게 생긴 수입을 슬쩍 남겨두고 가려고 했다.” (P.194)
<폭풍우>는 수록작 중에서 분량 면에서나 내용 면에서 가장 비중이 커다란 작품이라고 하겠다. 훌쩍 자란 아이들에게 현재의 집은 비좁기 그지없다. 역시 작가인 화자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할 생각을 지니고 적당한 집을 아이들을 통해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7년이나 함께 사는 동안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미래를 설계하고 실현하기 위해 조금씩 전진해 나아갔다. 아버지인 화자는 집밖의 폭풍우가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파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네 아이들 간의 다툼과 소동이라는 폭풍우를 가라앉히기 위해 무진 애를 쓰기도 하였다. 아이들이 무사히 자랄 수 있도록 일편단심으로 지키는 사람, 그것이 바로 부모이다.
하야가와 켄과 기노시다 시게루를 외치던 셋째가 프랑스의 빗세르를 찬사한다. 이처럼 “세 아이들은 각각 변해가고 있었다.”(P.116) 그리고 새로운 사람, 새로운 것에 현혹되는 그들은 아버지를 기존의 것에 천착하는 구시대의 인물로 여기게 된다. 증폭되는 갈등을 해소하는 길은 댐의 수문을 개방하듯이 그들에게 각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출구를 열어주는 일이다. 비록 한동안은 모두에게 “강한 폭풍우”(P.116)가 휘몰아치더라도.
“......내가 몸을 일으켰을 무렵에는 지난 7년 동안 계속해 온 듯한 쓸쓸한 폭풍우의 흔적을 다시 볼 마음이 일어났다. 이런 마음가짐은 그 큰아들의 집을 볼 때까지는 나에게 생기지 않았던 일이다.” (P.139)
첫째가 농부로서 고향에서 그런대로 제법 무난히 지내는 광경을 보면서 화자는 다소간 신뢰에 무게를 더할 수 있게끔 되었다. 둘째도 곧이어 형이 있는 고향으로 내려갈 준비를 한다. 셋째도 나름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막내딸도 여성적인 자태를 드러내게 되었다.
“모두 모두 그렇게 같은 길을 걷지 않아도 좋아.” (P.141)
중요한 것은 남이 정해준 길이 아니라 스스로 발견하고 깨달은 자신만의 길을 걷는 것이다. 화자도 지금 사는 집을 버린 마음을 되돌려 다시 한 번 좁고 답답한 이 집에서 버텨 보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시마자키 도손의 초기작은 처음에 자연주의 경향에 집착한 나머지 과도한 소재와 표현, 구성으로 인위적이며 정제되지 못한 느낌을 주었다. 연륜과 각고의 노력 덕분인지 후기작, 특히 <폭풍우>에 와서는 자연주의 사조가 자신의 삶과 펜에 녹아들어가 두드러지게 강조하지 않아도 작품 속에서 깊은 풍미를 갖출 수 있게끔 발효되었음을 알게 된다. 지극히 담박하고 은은하면서도 삶과 세상에 대한 관조의 경지를 느낄 수 있다고 해도 과찬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