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색일대남
이하라 사이카쿠 지음, 손정섭 옮김 / 현실과미래 / 1998년 8월
평점 :
품절


표제부터 무궁무진한 호기심을 자아내는 이 책은 음란하지만 외설적이지 않다. 그래서 광고 문구대로 일본 성(性) 문학의 하나로 헛된 기대를 품은 사람이라면 실망하기 딱 좋다. 이 작품은 유곽과 성(性) 문화를 다룬 풍속소설로 이해해야 마땅하다.

 

이하라 사이카쿠는 일본 근세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라고 일컬어진다. 일본 근세는 경제력을 갖춘 상인계급의 부상에 따라 그들의 관심과 취향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상인계급 출신의 작가들이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고 한다. 사이카쿠 역시 상인의 신분을 지녔다. 주인공 역시 상인의 아들이며 나중에 부유한 상인이 된다. 일본 문학사상 귀족과 무사들이 아닌 상인과 평민이 문학작품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 또한 이때부터이다.

 

구성도 독특하다. 주인공 요노스케가 7세가 되던 해부터 60세가 될 때까지 매해를 한 장으로 하여 총 54장으로 구성하고, 매해는 한 편의 대표적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해설에 따르면 이 작품의 문장은 하이카이조로 씌어졌다고 하니, 운문소설로 분류될 수 있겠다. 작가 사이카쿠는 당대에 하이카이의 대가로 인정받았으며, 이 소설은 그가 산문으로 전향한 첫 작품이다.

 

작가가 처녀작을 하필 性을 제재로 삼은 연유가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경제적 부의 축적에 성공한 상인 계급은 엄격한 신분제도 하에서 자유를 봉쇄당하고 정치적 발언권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들의 자신의 넘치는 에너지를 부(富)와 성(性)에 쏟았다. 부는 그렇다 치고 성의 자유로운 향유는 어찌 가능했을까? 그것은 당시 막부에서 정치적 억압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창구로 유곽 제도를 공인한데 따른 것이다. 독재 정부에서 3S 정책을 펼치는 것과 동일한 차원이라고 해야겠다.

 

사이카쿠가 작가적 시선을 가장 강력하며 절실한 화두에 돌렸음은 당연하다. 얼핏 일그러진 사회와 풍속을 비판하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을 것으로 추정하기 쉽지만, 작가는 전혀 비판의 상념조차 없다. 그는 오로지 자신이 듣고 보고 겪은 당대의 성 문화를 관찰자적 관점에서 독자에게 내보일 뿐이다. 작가의 요노스케에 대한 태도는 긍정적이며 때로는 경탄의 어조도 아끼지 않는다.

 

작품은 시종일관 요노스케가 종횡무진으로 다니며 여성과 남성을 섭렵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여자가 3724명, 남색의 상대가 725명이라고 하니 확실히 대단한 숫자다. 각각의 이야기는 요노스케가 겪은 사건들을 기술하고 있다. 제한된 지면에 사건과 행위 위주로 서술하다 보니 실제적 성애 장면의 묘사는 지극히 단편적이거나 생략되기 일쑤다. 오히려 유곽의 유녀(遊女)에 대한 소개와 외모와 복장에 대한 묘사가 더욱 두드러진다.

 

요노스케는 풍류남아다. 그가 색을 밝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무작정 취하려고 강제로 덤비지는 않는다. 유녀로서의 자색과 태도, 품위 등을 나름 선별하여 빼어난 여인을 높이 평가한다. 한편 사정이 딱한 유녀는 거금을 주고 유곽에서 빼내주는 사례도 심심치 않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요노스케의 일생에 걸친 모험이 아니다. 비슷비슷한 이야기들은 몇 번만 반복되더라도 식상하기 마련이다. 구체성과 세부적 개성이 미비하니 심금에 다가서기 어렵다. 현대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18세기 일본 사회의 서민 생활을 가감 없이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유곽, 사창가, 창녀촌을 찾는 이들은 결코 지배계급이 아니다. 그네들이라면 좀 더 은밀하고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할 것이다. 유곽은 예나 지금이나 사회의 밑바닥 영역에 속한다. 그들의 손님은 돈 많은 상인들에서 날품팔이에 이르기까지 신분제의 사다리에서 중간 이하에 해당한다. 게다가 성(性)의 영역은 지나칠 정도로 적나라하게 허울을 벗겨낸다. 제아무리 잘난 체하고 젠체 해봤자 성(性) 앞에서는 평등하다.

 

일본 근세의 유곽 현황과 유녀들의 구분 및 유곽 문화에 대해 알게 되어 또한 흥미롭다. 오사카, 교토, 에도의 3대 유곽에서 최고급 유녀인 타유로 불리는 이들은 극소수이며, 그만큼 그네들의 자태와 위세는 당당하다. 유녀들이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하여 거짓 사랑편지, 머리카락, 손톱 등을 활용하는 장면에서는 영악함에 탄복할 정도다.

 

미남자 요노스케도 나이가 드니 외모가 점차 추레해지게 된다. 이제 그의 화려한 시절은 지나가고 쓸쓸히 과거의 영광을 반추하는 따분한 신세로 전락하게 되는 요노스케.

 

“이제 몸은 어느 새 사랑에 야위었고, 더 이상 욕망에 대한 미련도 없었다. 부모도 없고 자식도 없으니 정처도 없다. 여색, 남색에 온 정기를 빼앗겨 다리는 뽕나무 지팡이가 없으면 서 있지도 못할 지경이었고 귀는 멀어 들리지 않았다.” (P.278)

 

예순 살의 요노스케는 결코 색(色)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의 마지막 모험은 배를 건조하여 정력에 좋은 음식과 보약 등을 잔뜩 싣고 여인들만 산다는 여호도라는 섬을 향해 항해를 시작하는 대목에 끝난다. 진정한 호색일대남이라고 할 밖에.

 

이 작품의 주인공 요노스케는 도덕적 면에서 볼 때 바람직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호색에 빠져 부모를 버리고 가출하였으며, 비구니와 유녀 등을 끝없이 탐하는 행위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일본판 피카레스크 소설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피카레스크 소설 자체가 귀족이 아닌 평민 대중을 주인공으로 삼아 사회의 법률적, 도덕적 제약과 족쇄를 무시하고 파괴하는 인물형을 만드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읽는 내내 작품의 명성의 근거는 무엇일까 고심했다. 작품 자체의 내재적 가치가 결코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시대적 배경과 제재의 이색성을 함께 파악할 때 당대 독자에게 크게 어필했던 사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또한 현대 독자에게는 표피적 흥미 외에는 그다지 다가오지 못하는 연유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근세 일본과 일본문학을 이해하려면 일독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본다. 다만 번역과 체재는 새롭게 해서 원작의 분위기를 좀 더 살릴 필요가 있다. 일본 기생의 호칭과, 요정의 명칭, 유곽의 풍습, 유곽 도시를 소개한 부록은 사전 배경지식으로 유익하다.

 

그런데 많은 남성들이 화류계에 빠지는 이유가 궁금하다. 이 책에서는 이해를 위한 단초를 제시한다. 이것이 수컷의 생물학적 속성 외에 유력한 설명의 근거가 될 수 있겠다.

 

“기생은 아름다운 존재. 목숨 바쳐 사랑에 빠진 손님에게는 인간의 도리 운운하며 멀리 대하고 자신과의 소문을 낸 손님에게는 즉시 그 유곽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쓰라림도 줬다. 또 으스대는 손님에게는 속세를 떠나 보도록 권하기도 했다. 유부남에게는 부인이 얼마나 원망할 것인지를 이야기해 주고, 반면 남들이 싫어하는 남자들에게도 상냥하게 말을 걸어 주고 손도 잡아 줬다. 모두들 타유에 대한 마음을 어찌할 줄 몰라 하다 어느 새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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