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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게쓰 이야기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70
우에다 아키나리 지음, 이한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수록 작품>
시라미네
중양절의 약속
잡초 속의 폐가
꿈속의 잉어
불법승
기비쓰의 가마솥 점
뱀 여인의 음욕
푸른 두건
빈복론
일전에 이즈미 교카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전통적 미학을 반영한 독특한 작품세계와 환상적 작풍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오늘 이 작품집을 읽으면서 이즈미 교카가 외따로 떨어져 있던 작가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다. 양자 모두 기담 내지 환상 문학이라는 동질성을 지니고 있는데, 우에다 아키나리의 백수십 년을 앞선 작품들에서 명백한 근대성의 뿌리와 아울러 탁월하면서도 개성적인 작품성을 발견할 수 있음은 큰 수확이다.
수록된 아홉 편의 단편들을 일관하는 공통성은 바로 환상성이다. 모든 작품들은 비현실적인 존재가 등장하여 이야기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수백 년 전에 한을 품고 죽은 스토쿠 상황과 도요토미 히데쓰구의 혼령,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무사의 영혼, 전란 속에서 남편을 기다리다 병사한 아내의 영혼, 잉어로 변신한 스님, 배신한 남편에게 복수를 하는 아내의 원혼, 평정심을 잃고 인육을 먹는 반요괴가 된 스님, 인간을 집요하게 사랑한 뱀 요괴, 황금의 정령 등이 이 작품에 등장한다.
혼령, 귀신, 요괴, 정령 등이 등장하는 여부는 근대 이전과 근대를 구분하는 바로미터이다. 근현대 문학에서 이들은 옛이야기나 동화에서나 볼 수 있는 허튼소리 또는 유치함의 표상이었다. 주류 문학에서 소외도어 연명을 거듭하던 환상적 이야기들이 환상문학이라는 독자적 장르로서 수면 위로 급부상한 것은 이십 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부터라고 하겠다. 18세기에 발표된 작품집이니 응당 전근대적 유치함이나 황당함이 들어있겠거니 지레짐작한다면 단연 섣부른 편견이라고 단언하련다.
이 이야기들은 작가의 순전한 창작이 아니다. 중국과 일본의 설화에서 소재와 줄거리를 상당수 차용한 일종의 번안소설이다. 글을 읽다보면 어디선가 한두 번은 읽거나 (영화 등에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단순한 번안에 그쳤다면 곧 독자의 기억에서 잊히고 말았을 테지만 시간의 도전을 버티어낸 것은 전래의 소재에 작가가 새로이 불어넣은 예술성의 탁월함 때문이다.
옛 전거들은 사건의 전개에 주력하였고 교훈적 요소를 강조하였다. 아키나리는 그렇지 않다. 사실성을 불어넣기 위하여 역사적 배경을 교묘하게 설정하였다. 사실(史實)과 가공이 뒤섞인 작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는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을 정도다. 일례로 <시라미네>의 주된 인물은 실존하였던 사이교 법사다. 그가 산 속 스토쿠 상황의 묘소에서 맞닥뜨린 상황의 혼령과 치열하게 논쟁을 벌인 대목은 역사상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이 벌어졌던 헤이안 시대의 말기(12세기)의 역사적 상황이다. <잡초 속의 폐가>에서 장사를 하러 떠나간 남편과 아내가 재회하지 못하게 된 사유는 역시 15세기 무로마치 막부 후기에 관동 지방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전란이 배경이었다.
아키나리는 또한 인물과 배경의 묘사에도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다. <시라미네>의 도입부에서 스님이 일본 각지를 주유하는 장면, <꿈속의 잉어>에서 병든 스님이 잉어가 되어 비와 호수의 명소를 헤엄치며 유람하는 대목 등은 간결함과 아름다움을 갖춘 자연 묘사의 빼어남을 보여준다. <중양절의 약속>의 청빈한 학자 하세베 사몬, <뱀 여인의 음욕>의 선량하면서 우유부단한 미남자 도요오와 마력적인 미모와 사랑에의 집착이 두드러지는 마나고 등 인물들의 개성적 성격도 분명히 하고 있다.
근대문학의 특징은 인물의 입체적 성격에 있다. 고전 문학의 인물들은 선과 악이 처음부터 구분되어 끝까지 획일적 성향이 유지되는 반면, 근대 문학에서는 인물들의 본성은 선과 악이 혼재되어 있다. 본성과 상황이 결부되어 선인이 악인이 되거나 그 반대도 가능해진다. 때로는 선악을 판단하거나 종잡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기비쓰의 가마솥 점>에서 남편의 배신에 죽어서 원혼이 된 이소라는 생전에는 효행과 정절로 칭찬받았는데, 죽어서는 처절한 복수만을 노리는 사악한 원혼이 되고 만다. <푸른 두건>의 주지 스님은 원래 덕이 높았는데 미쳐서 식인귀가 되었다가 가이안 선사의 인도로 죽어서나마 악업에서 벗어나게 된다. 압권은 역시 <뱀 여인의 음욕>이다. 마나고는 뱀 요괴임에 분명하지만 작중에서 과연 사악한 존재인지는 미지수다. 그녀는 오로지 도요오에 대한 사랑만을 갈구하고 있다. 도요오와 마나고의 교합의 결과는 알 수 없지만, 단지 인간에 대한 사랑을 문제 삼아 결국 뱀 여인을 죽게 한 것은 정의와 선악에 대한 가치판단을 어렵게 한다. 뱀 여인의 마지막 외침처럼 진정 무정한 것은 요괴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일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여기에 한 가지 장치를 더 마련하고 있다. 작품들의 시대적 배경이 되고 있는 중세 일본의 분위기를 재현하기 위해 당대의 사건 외에 동시대의 여러 저작들을 인용하고 있으며 특히 다수의 와카를 많이 끌어와 삽입하고 있다. 이 와카들은 작품의 내용과 성격에 부합하게 교묘하게 배치하여 마치 등장인물들이 직접 지은 것 마냥 작품과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준다.
구성과 기법, 주제의식 측면에서도 반추해볼 대목이 여럿 있다. 기본 뼈대는 옛이야기와 유사하지만 도입부에서 역사적 사실 및 사건과 결부시키는 방법이 가져오는 효과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개별 작품의 후반부에서 원작과는 다른 방향으로 작가의 주관적 의도가 짙게 반영되어 결말이 전달하는 종국적 인상은 상당히 다르게 다가온다. <중양절의 약속>은 정의의 복수극으로 성격이 변하였다. <기비쓰의 가마솥 점> 전반부의 바람둥이 남편과 지고지순한 아내의 순정극은 후반부에서 모골을 송연하게 하는 괴기담으로 변전하였고, 특히 결말의 암시적 묘사는 처절한 비극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빈복론>은 재물과 부(富)에 대해 긍정하는 근대 자본주의적 사고가 팽배해지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아키나리의 이 작품집은 단순히 번안에 그치는 게 아니다. 작가가 비록 소재와 주요 대목을 앞선 설화집에서 가져오긴 했으나 구성과 주제의식, 문체와 기법 등에서 철저하게 작가 자신의 스타일로 가공하여 완전히 재창조하고 있다. 이러한 요인들의 결과로 얼핏 터무니없는 괴담에 불과할 수도 있는 이야기는 당당한 문학작품으로 탈바꿈하는데 성공하였다.
솔직히 일종의 의무감 비슷한 심정으로 마지못해 책장을 펼쳐들었는데 읽을수록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현대적 의미의 환상소설을 작가는 이미 18세기에 거의 완벽하게 구현해 놓았다. 번역도 원작의 중세적 우미한 분위기를 잘 살려 깔끔하고, 충실한 작품 개별 해설과 종합 해설, 주석 등 별달리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로 편집도 완성도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