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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 이야기(伊勢物語)
구정호 엮음 / 인문사(도서출판)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일본의 고전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모노가타리(物語)는 형태상 쓰쿠리 모노가타리와 우타(歌) 모노가타리로 구분할 수 있다. 후자는 노래와 산문이 혼재된 형식이며, 이때 노래는 전통 시가인 와카(和歌)를 의미한다. 그리고 최초의 우타 모노가타리 작품으로 꼽히는 작품이 9세기경의 <이세 이야기>이다.
우리 옛글도 아니고 세계적 고전 명작도 아닌 작품에 일반 독자들이 관심을 가질 일은 거의 없다. 이 번역본은 일본고전을 연구하는 후학들을 위한 책이다. 번역문뿐만 아니라 원문도 수록하였으며, 충실한 주석을 달았고 수록된 와카를 찾아보기 쉽도록 색인도 추가하였다.

<이세 이야기>의 작품 성격은 해제에 잘 소개되어 있다.
“<이세 이야기>는 총 125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인공인 어떤 남자가 초단에서 성인식을 치루고 마지막 단인 125단에 이르러 세상을 하직하는 일대기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헤이안 시절의 귀족의 이야기다.” (P.8)
주인공인 어떤 남자는 ‘아리와라노 나리히라’라고 하는 실존 인물을 빌려온 것으로 내용에는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다. 이 작품에서 다루어지는 가장 커다란 사건은 주인공과 두 여인 간의 사랑이다. 전반부에서는 니조노 이사키라는 황실의 여인과, 중반부에서는 이세신궁의 재궁으로 있는 여인-역시 황실의 여인-과 각각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을 나눈다. 둘 다 허구의 사건인데 당대 독자의 흥미를 유도하기 위하여 가공의 스캔들을 삽입한 것으로 설명된다.
각 단의 시작은 대개 유사한 패턴을 보인다. 상당수가 “옛날에 (한, 어떤) 남자가 있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간략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와카로 마무리한다.
색인을 제외하고 해제와 본문을 합하면 270면 정도의 분량인데, 절반가량은 원문이므로 실제 가독 분량은 그리 많지 않다. 전체적으로 일독을 한 후의 소감은 별로 재미는 없다고 요약할 수 있다. 각 단의 내용상 핵심은 이야기가 아니라 와카인데, 운문의 특성상 번역문을 통해서는 원작만의 기법상, 정서상 미묘함을 파악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이 여기서도 유효하다. 더구나 와카는 정형시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언어 유희적 기법이 자주 쓰인 점도 인상적이다.
시적 진미를 제쳐놓으면 천년 이전의 일본인들의 감수성은 현대인들과 그리 멀지않음을 알게 된다. 아름다운 이성에 한눈에 반하여 사랑을 갈망하고, 연인의 무정한 마음에 가슴 아파하며, 다투고 헤어져서는 눈물과 한숨에 젖어든다. 사랑 이야기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그 밖에는 빼어난 경치의 찬미 또는 권력자에 대한 경의 등을 읊조리기도 한다.
솔직히 말해서 해제에서 언급한 일대기 형식을 염두에 둘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일관된 줄거리를 갖춘 인물의 삶을 추적하는 일대기가 아니다. 중간에 주인공을 상기시키는 이야기들이 등장할 뿐 거의 대다수는 어떤 남자와 어떤 여자 간의 사랑 관련 에피소드이며 이것을 반드시 주인공의 행위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만큼 각 단의 독립성이 강하여 하나씩 따로 읽더라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즉 별개의 이야기와 와카 모음집으로서.
당시 일본은 국가 체제가 정비되고 가나 문자가 발명되며 후지와라 가문을 중심으로 하는 신분제적 귀족정치가 안정됨에 따라 정치적 격변이 가라앉게 되었다. 정치적 안정은 자연스레 고급문화에 대한 수요와 필요를 낳았고 세련된 교양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여기서 ‘미야비’라고 불리는 풍류, 멋스러움, 세련됨 등과 같은 풍조가 유행하고 우대받게 되었다. 멋진 남성 또는 여성으로 인정받으려면 무엇보다도 외모의 아름다움이 중요하지만 그게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세련된 복장과 품위 있는 언행, 그리고 와카를 자유롭게 지을 수 있는 능력 등이 열정적인 사랑과 결합되어야 진정으로 미야비를 갖춘 것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무수한 사랑 일화가 등장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당시의 시대적 문화적 풍조는 그것을 예찬하고 격려하였다. 각 단의 이야기와 와카를 다소간의 지루함을 참고 차근차근 읽어나가다 보면 당대인들의 감정과 사고에 문득 친숙하게 다가옴을 깨닫게 된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의 틀을 인정하면서도 계급을 뛰어넘어 사랑을 이루려다가 좌절하고, 수도를 떠나 정처 없이 지방을 방랑하면서 마주치는 여인들과의 인연, 그리고 잊지 못하는 사랑에 대한 아쉬운 탄식.
실존 인물의 반영과 허구의 사건 등을 도입하고, 이야기와 운문이 뒤섞인 이 작품에서 때와 곳, 문화를 달리하는 우리들이 느끼고 이해할 점은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면 이 책은 학술적 의의를 떠나 일반 독자에게도 충분히 소구할 만하다.
※ 참고삼아 짤막한 제3단을 소개한다.
옛날에 한 남자가 있었다. 마음에 둔 여자에게, 녹미채라는 것을 보내려고,
사랑한다면 덩굴풀 잠자리도 나는 괜찮소
비록 이부자리로 옷소매 깔더라도
니조노 기사키가 아직 천황을 섬기지 않으시고 보통의 사람으로 계셨을 때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