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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ㅣ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2
제인 오스틴 지음, 최정선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6년 4월
평점 :
품절
미스 엠마 우드하우스에게,
엠마, 이렇게 불러도 큰 실례는 아니겠지요? 미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통해 당신과 다소간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엘튼 부인처럼 경우 없다고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미스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 중에서 <오만과 편견>과 <이성과 감성>을 대표작으로 꼽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중적 인지도와 선호도 면에서 비교 해봐도 실제로 그렇습니다. 엠마 당신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 소설을 높이 평가하는 평론가들도 제법 있으니 별로 서운해 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대중적 인기와 작품성이 항상 동행하지는 않으며, 주인공들에 대한 평가도 더더욱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소설 <엠마>가 분량이 많다는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은 게 아닐까요. 현대 독자들은 두터운 책을 힘들어하는 추세랍니다. 장편소설 중에서도 소위 경장편이 최근에 두드러지는 경향도 이를 말해주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자신은 <엠마> 보다는 <오만과 편견>을 더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사건이 속출하며 엠마 당신이 쉴 새 없이 좌충우돌하는 약간은 우연과 인위성에 의존하는 작품 전개 구조가 재미와는 별도로 선뜻 다가오지 않습니다.
엠마, 당신은 엘리자베스와 엘리너와 비교하면 활발하고 역동적이지만 약점이 두드러지는 인물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좋은 가문 배경에 자부심을 갖고 있지요. 자신은 이를 굳건히 지켜야 할 원칙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느끼고 있는 반면, 타인 특히 해리엇에 대해서는 이것이 급격히 흐트러짐을 보게 됩니다. 해리엇에 대한 맹목적 편애로 당신은 해리엇의 상황과 처지에 대한 합리적 판단을 하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가 사랑하는 해리엇에게 두 번이나 사랑의 헛된 기대를 품게 하고 슬픔을 겪게 하는 일의 반복이었습니다.
엘튼 씨와 해리엇을 엮어주려는 눈물겨운 노력에서 엘튼 씨가 보여준 적극적 관심과 호의의 대상이 과연 누구였는지 독자들은 이미 눈치 챘답니다. 미스 제인 페어펙스와 딕슨 씨의 관계를 의심하는 듯 한 발언을 할 때 프랭크의 응대에서 뭔가 미묘한 변화를 당신을 제외한 독자들은 짐작할 수 있었지요. 당신처럼 분별력 있고 똑똑한 분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오로지 이성 보다는 감정과 직관에 의존한 당신의 능력을 과신한 탓이 아니었을까요?
엠마, 당신은 스스로에 대하여 잘 모릅니다. 당신은 좋은 가문에, 뛰어난 미모에 탁월한 지적 감수성과 배려심을 가진 젊은 여인입니다. 신분 고하와 연련 다소를 막론하고 모든 남성들이라면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미혼 남성의 경우라면 결혼 상대자로서 현실적으로든 또는 공상에서나마 한 번씩은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스스로 결혼에 대한 의향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들의 바램마저 억제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망각했던 거지요.
당신이 호의를 가지기 힘들었던 두 인물, 엘튼 부인과 미스 제인 페어펙스에 대해서 전자라면 나 역시 마찬가지 의견입니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속물적이며 과시적인 데다가 타인에 대한 우러나오는 배려심과 동정심이 결핍된 졸렬한 품성의 타입 말이죠. 미스 제인 페어펙스에 대한 그녀의 관심과 친절도 그다지 호의로 인식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지위의 상대적 우월함에 기초한 불우이웃돕기 차원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반면 불쌍한 미스 제인 페어펙스에 대한 당신의 태도는 지나치게 옹졸하고 편향적이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당신이 뒤늦게라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점에 대해서는 기쁘게 생각합니다만.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하지요. 당신이 제인의 입장과 처지에 놓여 있다면 마찬가지로 상대방에게 자신의 언행에 대해 보다 공감과 이해심을 요청하는 마음을 가졌을 겁니다. 빼어난 미모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집안 처지라 앞날에 대한 밝은 기약도 갖기 어려우며, 부유한 동년배의 여성으로부터 아무런 친교와 친절도 받지 못한 상황. 누구나 다 마찬가지랍니다. 내세울만한 게 없는 처지에서는 세상에 당당하기 어렵습니다. 소극적이고 주저하며 조용함에 머물러 있게 마련이지요.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차갑다고 오해하고 해리엇이 백배는 낫다고 주저 없이 단언하는 당신은 섣부르고 가혹합니다. 나이틀리 씨의 평가를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어요.
“제인 페어펙스도 감정이 있어요. 나는 그녀가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녀는 감정이 섬세하고, 참을성이 있으며, 자제력에 있어서나 인내심도 강한 편이지요. 다만 툭 터놓는 맛이 없고, 모든 것을 속으로만 감추는 사람이지요.” (P.3120
엠마, 한 가지 궁금한 사실은 당신이 남들의 인연 맺어주기에 왜 그리 관심이 많은지 이상할 정도랍니다. 미스 제인 오스틴의 다른 작품들의 경우 결혼은 이상이 아닌 당장 눈앞에 닥쳐오는 현실적인 사안입니다.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거의 인정되지 않는 시대적 분위기, 소위 결혼 적령기를 놓치고 나면 노처녀로 일생을 보내며 경제적 궁핍을 감수해야 하는 불안감. 젊은 아가씨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괜찮은(경제적, 사회적으로) 남성을 만나려고 노력합니다. 이건 매우 당연하므로 그네들의 관심사가 전적으로 여기에 쏠려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닙니다.
엠마 당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 자신은 몸이 불편하고 성미가 까다로운 늙은 아버지를 생각하여 당분간 결혼 생각이 없습니다. 스스로가 잘났음을 자각하고 있기에 자신에게 어울리는 적합한 상대를 쉽게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도 작용했겠지요. 더군다나 가정교사였던 미스 테일러를 웨스턴 부인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즐거운 기억도 추가됩니다. 이런 요인들과 타인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분수를 넘는 자신감이 결합되어 결국 해리엇의 결혼 주선이라는 외견상 터무니없는 세 바탕의 에피소드를 연속해서 만들어내었던 것입니다.
뒤돌아 생각해보면 당신의 사고는 기실 그다지 합리적이지 못합니다.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오만과 편견에 빠져 있는 게 아닐까요. 해리엇의 출신에 대한 환상과 나이틀리 씨가 높게 평가하는 농부 마틴 씨에 대해 지닌 계급적 차별의식. 자신에 대한 엘튼 씨의 구애에 대해 어이없어 하면서도 그에 대해 해리엇의 결혼 가능성을 부추기는 이중적 잣대. 이성적으로는 미스 제인 페어펙스에게 다정히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모순된 행동 등.
언뜻 보면 제가 당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애정어린 관심의 표명이라고 받아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저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에게 도저히 적개심을 품을 수가 없군요. 나이틀리 씨 또한 동종의 감정을 가졌을 겁니다. 그러기에 그는 당신에게 화를 내거나 실망하기도 하면서도 당신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었을 테지요. 위에서 말한 결점들은 당신이 자아내는 모든 미덕에 비한다면 하찮습니다. 당신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고 편하게 만들어주는 싹싹하면서도 즐겁고 활기찬 태도를 보여줍니다. 당신의 말과 태도는 즉흥적이지 않고 대부분 신중한 분별력에 기반하여 이루어집니다. 당신의 외모와 신분은 엠마 당신 자신의 참다운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장신구입니다.
우리말 중에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엠마 당신은 나이틀리 씨의 당신에 대한 감정을 단순한 친구 사이의 우정으로만 여겼습니다. 당신 자신의 감정도 그렇게 해석하였지요. 진정으로 소중한 존재는 어느 날 하늘에서 우연히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마땅히 그러하듯이 우리 주변에서 자신을 과시하지 않고 오롯이 우리를 지켜보며 감싸주고 따뜻한 마음을 베풉니다. 대개는 뒤늦게야 이를 깨닫고 뼈저린 후회를 하지만요.
해리엇이 나이틀리 씨를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 비로소 당신 자신의 숨겨진 감정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화살처럼 날아드는 생각은 바로 나이틀리 씨는 자기말고는 누구하고도 결혼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P.438)
이쯤에서 소설에서 당신을 창조한 미스 제인 오스틴을 생각합니다. 그녀는 약혼자에게 파혼 당하고 노처녀로 오빠네 집에 얹혀살며 생활을 위해 글쓰기를 하게 되는 불행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자신이 처한 형편에 대한 한탄을 엠마 당신의 입을 통해 잠시 엿볼 수 있습니다.
“독신 생활이 혐오감을 주는 것은 가난 때문이야! 쥐꼬리만한 수입을 가진 독신 여자는 우스꽝스럽고 흉하지.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기에 딱 알맞지만 일정한 수입을 가진 독신 여성은 어느 누구 못지않게 존경받을 수 있고 호감도 줄 수 있지.” (P.98)
미스 제인 오스틴은 불과 6편의 소설만을 세상에 남겨놓았지만 후대에 문학사상의 귀중한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에서 거창한 인류사적 사건과 이념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당시에 자신이 보고 듣고 겪었던 일상의 소소하고 자잘한 사건과 인물 등이 그녀의 주된 관심사입니다. 남녀 간의 사랑과 결혼이라는 아이템은 자신의 이루지 못한 애정사와 맞물려 그녀에게 무궁한 소재와 대리만족을 제공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독자들은 그녀의 작품을 통해 불변하는 인간사와 인간관계의 다채로움을 맛볼 수 있으며, 국경과 시기를 달리하는 사고와 관습을 관찰하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엠마, 부디 나이틀리 씨와 잘 사시고 부모를 닮은 멋지고 예쁜 아이들을 낳아서 많이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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