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답게 사는 즐거움
이덕무 / 솔출판사 / 1996년 7월
평점 :
절판


이덕무는 학문과 일생을 통해 참다운 인간상을 구현하고 보전하는데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독서 목적, 성리학 외의 소위 잡학에 대한 관심, 고증학적 치밀함 등은 순전한 지식욕의 추구 차원이 아니다. 내적으로는 영혼의 순정하고 충일함을 구현하기 위함이며, 외적으로는 가난, 질병 등의 물리적 제약으로 인하여 내적인 수양이 지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는 알고 있다. 인간의 성정은 거울과도 같이 깨끗하고 맑지만, 나날이 닦아주지 않으면 금세 손때가 묻고 흐릿해지기 십상이다. 그가 <사소절>을 쓴 연유도 여기에 있다. 선비는 작은 행실, 사소한 예절부터 주의를 기울여 법도를 잃지 않아야 한다. 그는 말한다. “작은 예절을 닦지 않고 큰 의리를 실천하는 자를 나는 보지 못하였다.”(P.4). 이 책에서 이덕무는 선비 자신은 물론 아이와 부녀자가 지켜야 할 일상의 규율 등을 상세히(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밝히고 있다. 


여기에 제시된 모든 예절이 현재 시점에서 전부 유효한 것은 아니다. 일부는 시대적, 문화적 차이로 인하여 오늘날에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진부하고 구태의연한 가르침도 분명히 있다. 더욱이 유가의 기본 틀을 신봉하고 수호하려는 그의 자세는 세세하고 꼼꼼한 측면까지 신경을 쓰다 보니 과도한 측면도 분명히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우리들은 옥석을 가리는 심경에서 이해를 도모해야 한다. 시간의 흐름을 이겨내고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은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진부한 옛말이라면 저자가 이런 글을 쓴 당대의 문화적 배경의 실상을 파악해보면 납득이 갈 것이다.


“부부의 화목은 가정의 행복이다. 화목하면 아무리 빈천하더라도 걱정할 것이 못 된다. 부부의 불화는 가정의 재앙이다. 불화하면 아무리 부귀하더라도 기쁠 것이 못 된다.” (P.78)


“남편과 시부모가 사납게 성질을 부리거든, 부인 된 사람은 머리를 숙이고 숨을 죽이고 조심조심 받들어 더욱 공손한 태도를 보이고 조금도 비위를 거스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무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P.92)


여성의 예절 편에 나오는 가르침이다. 화목한 가정의 중요성은 고금을 막론하고 여전히 금과옥조다. 다만 화목 유지의 책임을 조선시대에서는 여성에게 부과하고 있음을 여기서 알 수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말없이 참고 견디라는 것, 그것은 시집가서 시댁의 귀신이 될지언정 친정에 돌아와서는 안 된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이것이 뿌리 깊은 그 시대의 정신이었다.


“여자가 윷놀이를 하고 쌍륙치기를 하는 것은 뜻을 해치고 위의를 거칠게 만드는 일이니, 나쁜 습속이다.”


친족 간 친선을 도모하기 위하여 전통놀이를 장려하는 관점에서 보면 당혹스러운 주장이다. 하물며 이덕무가 현대인들의 고스톱 놀이를 본다면 기절할 지경이리라. 과연 바둑이나 장기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그답다. 


선비가 지켜야 할 것으로 언급한 시시콜콜한 예절 중 몇 가지 사례다. 우습기도 하며 어처구니없을 지경이다. 물론 지키면 좋겠지만 생리학적으로 불가피한 경우는 어쩌란 말인지.


“남과 함께 회를 먹을 때에는 겨자를 많이 먹음으로써 재채기를 해서는 안 되며, 또한 무를 많이 먹고 남을 향해 트림하지 말라.” (P.140)


“상추·취·김 따위로 쌈을 쌀 때에는 손바닥에 직접 놓고 싸지 말라. 점잖지 못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P.141)


단편적 내용만으로 별 볼일 없는 책으로 치부해서는 잘못이다. 의외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딱딱한 예의범절만 나열하지 않고, 과거와 선대의 구체적 사례와 인용이 많이 수록되어 있어 옛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간접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믿고 헤어 나오지 못하는 소위 미신이라는 영역(관상, 풍수지리, 사주팔자 등)에 대한 이덕무의 입장은 단호하다. 


“담명(談命)·석자(析字)·관상(觀相)·감여(堪輿)를 하는 부류는 본디 마음이 삐딱하여 좋지 못한 사람들이다. 백성을 우롱하고 요망한 말로 마구 속이니 사군자는 물리쳐 멀리해야 한다.” (P.243)


세상이 날로 삭막하고 흉흉해지고 있다. 핵가족화와 고령화의 사회적 충격은 가족 간, 친족 간 정리마저도 나날이 옅게 만들고 있다.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는 가족 전체가 아니라 오직 본인들의 사고와 입장만을 독선적으로 부르짖고 있다. 개인이 인간으로서의 기본 도덕률을 무시하면 가정이 본연의 모습과 역할을 유지할 수 없다. 뿌리가 흔들리는 사회와 국가는 불안정의 위험과 대가를 멀지 않은 미래에 톡톡히 치를 수밖에 없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옛말은 낡은 허언이 아니다. 개인 각자가 스스로의 참모습을 계발하고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이토록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가르침을 여럿 찾을 수 있었다. 그 중에서 학문을 하는 적절한 단계를 제시하는데, 한학을 공부할 때 참고하면 도움이 되겠다.


“대학·논어·맹자·중용은 학문을 해 올라가는 과정에서 계단이 일사불란하다. 그 뒤를 이어서 공부할 책은 격몽요결·소학·근사록·성학집요로서, 규모가 정밀하여 얕은 데서 깊은 데로 들어가는 계안이니, 나는 일찍이 그것은 후사서(後四書)라고 불렀다.” (P.180)


사람 간 교제에 관하여 경구라고 할 만한 문장도 있다.


“거짓된 인품은 사람을 많이 상대할수록 더욱 교활해지고, 참된 인품은 사람을 많이 상대할수록 더욱 숙련된다.” (P.199)


그러면 그가 생각하는 우도(友道)는 어떠한가.


“겸손하고 공손하며 아담하고 조심하며 진실하고 꾸밈이 없으며, 명절(名節)을 서로 부지하고 과실을 서로 경계하며, 담박하여 바라는 바가 없고 죽음에 임하여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 참된 벗이다.” (P.199)


이덕무는 정통 유학자다. 그는 평생 한학을 공부하고 갈고 닦는데 심신을 전념하였다. 한글은 부녀층과 서민층에서 일부 사용되었지만 점잖은 선비들은 여기에 관심을 기울여서는 안 될 뿐더러 구태여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다. 그의 수많은 시작품이 모두 한시(漢詩) 형태임을 기억하자. 그런 이덕무가 한글에 대하여 제법 흥미롭게 언급한 대목을 찾게 되어 기억에 남기는 차원에서 끝으로 이를 옮겨 적는다.


“훈민정음은, 자음·모음의 반절과 초성·중성·종성과 치음·설음의 청탁과 자체(字體)의 가감이 우연한 것이 아니다. 비록 부인이라도 또한 그 상생상변하는 묘리를 밝게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말하고 편지하는 것이 촌스럽고 비루하여 모범적인 것이 될 수 없다.”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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