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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선생
다야마 가타이 지음, 김욱송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다야마 가타이는 일본 근대 자연주의 문학사조를 대표하는 작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이불>이라는 작품이 특히 유명하다. 이런 관점에서 자연주의에 대한 반감을 가진 이가 작가와 다른 작품들을 섣불리 재단하면 낭패를 볼 수 있음을 이 <시골선생>은 깨닫게 한다.
자연주의 사조는 인간의 고상하고 아름다운 면뿐만 아니라 추악하고 숨기고 싶은 모습마저 여과 없이 묘사해야 진정한 인간의 전모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이해된다. 원론적으로는 옳은 주장이지만, 자칫하면 우리가 소설을 읽는 원초적 동기와 소설이 인간 문화와 정신 영역에서 차지하는 지위를 과도하게 확대 해석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이 <시골선생>을 무리해서 자연주의로 규정할 당위성은 없다. 이 작품이 통상적 의미의 자연주의 범주의 하나라면 자연주의에 속하지 않는 작품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중학교를 졸업한 청년 하야시 세이조는 어려운 가정형편 덕분에 친우들과는 달리 시골학교 교사를 직업으로 택한다. 잠재된 꿈과 야심을 갖고 있지만 환경적 장애는 그를 점점 의기소침하게 하고 도덕적으로도 방황하게 된다.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교사로서의 삶에 매진하려고 하지만 심각해진 폐병으로 끝내 숨을 거둔다.
내용 자체는 지극히 비극적이며, 암울한 분위기가 작품 전편을 휘감을 것으로 충분히 예상되는 반면, 독자는 작품 분위기가 어둡기는커녕 밝고 의외로 담담한데 놀라게 된다. 분명 작가는 세이조의 답답한 심경에 대해, 나아지지 않는 형편에 관해 반복적으로 토로하고 있지만, 그것이 독자에게는 그다지 슬프고 침울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공언된 심각하고 진지한 기술과는 달리 언뜻 작중 인물의 상황은 이렇단다...하고 남의 이야기를 전언하듯 가볍게 지나치는 듯한 작가의 암묵적 의도가 엿보인다면 완전한 오독일까. 그만큼 주인공의 심경에 작가는 의식적으로 몇 발짝 떨어져서 관조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작가가 공감과 공명하지 않는 작중 인물의 행동과 태도는 그래서 창밖을 통해 바라보는 행인만큼이나 낯설고 간접적 존재로 간주된다.
가타이는 작품의 주된 배경인 사이타마 현의 자연묘사에 더욱 매력을 느낀 듯하다. 강과 들판이 어우러진 정경, 각종 꽃과 나무들에 대한 낱낱의 언급을 통해 당대 일본 전원의 풍경이 얼마나 아름답고 매혹적인지 백여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눈앞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작중 주인공은 세이조가 아니라 오히려 자연이 아닐까 의문시되기도 할 정도다. 여기에 시골사람들의 소박하면서 일상적인 삶의 풍속과 자취를 가감 없이 묘사하여 당대 일본의 시골 풍속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주의 사조의 작품들이 대개 비정하고 냉혹한 것으로 치부된다면, 이 작품은 대척점을 이루는 다른 의미에서의 자연주의 흐름에 해당한다. 감상적 자연주의 내지 낭만적 자연주의 정도로. 작가가 여기에서 드러내는 것은 거창한 삶의 드라마와 투쟁이 아니다. 세이조가 처음에 비웃었던 시골사람들의 삶, 나날을 영위하고 자신들이 알고 가진 한도 내에서 성실하게 일생을 꾸려나가는 생활. 그것을 나중에 세이조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를 세이조의 의식의 퇴행으로 해석하지 말자.
청년이라면 가슴 속 한켠에 나름의 야망을 품고 있다. 실현가능성과 관계없이 꿈을 가지고 있는 한 그는 행복하다. 꿈을 위해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수 있다면 더욱 더 행복한 반면, 외부적 요인에 의해 꿈의 실현이 억제될 때 그는 무한한 절망과 아픔을 느끼게 된다. 세이조는 친구들의 전진을 기뻐하면서 비교하여 자신의 처지를 한층 슬퍼한다.
“친구의 성공을 축하하는 편지를 쓰던 중 세이조는 책상에 엎드려 자신의 불행을 생각하며 울지 않을 수 없다.” (P.131)
“세이조의 마음은 쓸쓸했다. 자신이 처한 환경은 실제 생활에 있어서도, 연애에 있어서도, 학업에 있어서도 점점 더 소극적으로 기울어지게 만들었다.” (P.165)
세이조는 풍금을 열심히 연습하여 도쿄의 음악학교에 지원하나 한계를 절감한다. 다소간의 문필적 재능이 있지만 뚜렷이 인정받을 수준은 되지 못한다. 스케치북에 자연을 그리는 걸 좋아하고, 생의 후반기에는 화초 표본 분류에 열의를 쏟기도 한다. 그는 특출한 재능을 지닌 청년이었던가. 아마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다소간 똑똑하며 자의식을 강하게 느끼는 평범한 청년이라는 것이 냉정하지만 오히려 적확한 평가에 가깝다.
그는 오규처럼 쉽사리 현실을 인정하고 수용하지 못한다.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되 현상에 함몰되지 않으며, 공상과 지나간 꿈에 연연하여 현실을 방랑하지 않아야 한다. 실제에 단단히 다리를 세운 채 일상에서 조금씩 전진을 도모할 수 있다면 그것도 의미 있는 삶이다, 오규의 생활처럼. 세이조는 병이 심해지고 나서야 친구의 진가를 알게 된다.
“예전에 이 친구를 평범하다고 본 것은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아직 미숙했던 탓이다. 오규에 비하면 나는 세상 물정도 많이 모르고 인정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오바타나 이쿠지와 이 친구를 비교해보니, 지금 처음으로 평범함의 위대함을 알게 되었다.” (P.286~287)
우리는 시골이라는 어휘에 모호한 금빛 색채를 부여한다. 시골을 전원과 동일시하고, 속세를 벗어난 초탈의 외피를 덧씌우고 스스로 황홀해한다. “청렴하고 이상적인 생활을 하며 자연의 평온한 품에 안겨 사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시골도 역시 전쟁터이며 사리사욕에 물든 세상이라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되었다.” (P.195) 어딘들 사람들이 사는 곳이 그러하지 않겠는가. 이를 외면하고 부정한다면 그는 스스로 세상과 불화하고 소외되는 삶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현실을 긍정하고 소위 건전한 삶과 대조적인 삶의 방식이다. 세이조가 소학교가 위치한 동네를 마다하고 멀리 떨어진 절에서 살거나 아니면 학교 당직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방식은 스스로를 현실에서 격리시키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가 처음부터 시골마을에서 마을 주민들과 더불어 사는 길을 갔더라면 자발적 유폐와 고립의 길을 걷지 않았을 텐데.
죽음에 임박하여 새삼 자신과 현실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을 때 종전에는 나태하고 한심하게 보였던 사람들의 일상적 행동과 사고가 자체로서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답고 뜻 깊은 것인지 세이조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하뉴로 이사하여 가족이 다시 재회하게 된 날, 이웃에서는 새우튀김과 생선구이를 선물로 가져왔다. 집주인은 낚시와 나무 가꾸기를 좋아하는 재미있고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예전의 세이조라면 오뉴의 가치와 더불어 결코 알아차리지 못하였을 소소한 미덕들이다.
작가의 <이불>이 워낙 당대에 파격적 논란을 불러온 연유로 그에 대해 과다하고 불필요한 선입견이 덧씌워지게 되었다. 이전 작품에서 그의 작품 경향이 대체로 감상적이고 서정적이었던 점과, 이 <시골선생>의 표현과 문체상 특징을 유추해 볼 때 단일한 사조로 치부해 버린다면 그의 작품세계의 여러 뛰어남을 크게 놓치게 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 20세기 초라는 시간적 배경과 근대 일본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감안할 때 작품 말미에 두드러지는 군국주의 일본에 대한 동시대인으로서의 자찬은 불가피성을 인정하더라도 씁쓸함을 안겨준다. 만주 진출을 당연시하고 애국적 색채로 포장하며, 러일전쟁의 승리를 강대국 세계의 당당한 일원으로 진입하였음을 찬미하는 사실은 작품 전체의 성격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아 오히려 기묘함을 안겨준다. 작가의 진정한 의도는 죽어가는 세이조가 드러내듯이 군국적 전체주의에 휩쓸려 들어가는 일본에 국민으로서 기여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한탄인가, 아니면 세이조의 죽음과 당대 군국주의의 비인간적이고 몰인정한 현실을 선명한 대조를 통해 뚜렷하게 부각하여 비판하고자 하는 작가의 치밀한 노림수인지 이 한 편만으로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