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동기담 - 일본 화류소설의 정수
나가이 가후 지음, 박현석 옮김 / 문예춘추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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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국내에 소개된 나가이 가후의 유일한 작품이다. 나름 일본 근대문학사에서는 지위를 인정받고 있는 작가인데 국내에서는 상대적으로 대접이 소홀하다고 할 밖에. 그는 초기에 자연주의 문학 풍을 선보였는데, 구미 유학 후에는 낭만주의와 상징주의 풍의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하였다.

 

이 <묵동기담>은 1937년에 발표한 그의 최후기작이다. 책 뒤표지의 소개 문구대로 소설인지 르포인지 수필인지 경계가 모호한데, 도쿄 뒷거리 스미다가와의 유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가의 분신인 화자는 여름밤 더위와 소음을 피해서 밤산책을 하다가 데라지마마치에 이르고 마침 내린 소나기로 인해 우연히 오유코라는 화류계 여성을 알게 된다. 화류계라고 우회적으로 표현하지만 정직하게 표현하자면 몸을 파는 매춘부이다.

 

화자는 화류계가 부정 암흑(不正暗黑)의 거리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뒷골목 음지의 유곽과 화류계 여성을 작품의 제재로 삼은 것은 일면 물론 에로티시즘에 관심을 기울여 온 가후의 특징이다.

 

“정당한 아내들의 위선적인 허영심, 공명한 사회의 사위적(詐僞的)인 활동에 대한 의분이 그를 처음부터 부정 암흑이라 알려져 있는 다른 한쪽으로 치닫게 한 유일한 힘이었다.” (P.86~87)

 

여기에 위와 같은 인식이 더해진다. 외면상 선하고 깨끗한 양 인위적으로 꾸미는 대신 깨끗하면 깨끗한 대로 더러우면 더러운 대로 현상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 화류계는 불결한 사회악으로 치부되지만 엄연히 우리네들 옆에 가까이에서 실존하는 세계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말초적인 자극을 간질이는 뭔가를 상상하면 큰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작품은 굴곡 없이 무덤덤하게 흘러간다. 별 볼일 없는 중늙은이와 마찬가지로 내세울 것 없는 유녀(遊女) 간의 일상적 만남과 대화가 이어진다. 여기에 화자 자신이 구상하는 소설에 관한 이야기가 병치된다.

 

사실 통속적으로 다가오는 제재라는 점을 제외하면 이 작품의 참된 모습은 다른데 있다. 화자가 데라지마마치를 자주 찾게 되는 것은 그것이 개발이 덜 된 도쿄 소시민과 하층민들의 삶이 예전과 유사하게 이어지는 터전이기 때문이다. 오유코도 동종 직종의 다른 여성들과는 달리 기모노 차림의 전통적 꾸밈을 하고 있어 화자의 향수를 불러일으킨 데 있다.

 

화자가 묘사하는 도쿄의 옛 거리와 인물들의 풍정(風情)은 작품이 쓰여진 당대에서는 이미 사라져 찾아볼 수 없는 과거의 추억이 되고 말았다. 일본이 근대화를 시작한 이후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도쿄도 대도시로 성장하면서 도쿄 특유의 모습들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세계적 강대국이 된 일본, 중일전쟁이 한창인 군국주의가 횡행하던 시절에 바람직한 현대인의 모습은 스스로 우월해지기 위해 경쟁을 불사하고 용쟁 분투하는 인물형이다.

 

화자와 같은 소시민은 정부와 주류가 선도하는 전체주의적 의식과는 무관하게 자신만의 개인적 삶을 영위하기에 급급할 뿐이다. 작은 것의 가치를 소중히 할 줄 아는 인식은 당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으며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여전하다.

 

작가는 도쿄의 유곽과 매춘부를 통해서 작고 평범한 존재의 가치를 되살리고 근대화란 명목으로 막무가내로 없애버리는 사회적 추세에 미약하나마 저항을 나타낸다. 결국 사회와 문명 비판으로 나아가는 이러한 연결점에서 작가는 크고 높은 목소리로 부르짖지 않는다. 담소를 나누듯 속삭이듯 나긋나긋한 어조로 더없이 담담하면서 평이한 어투로 낮게 읊조릴 따름이다. 역설적으로 이게 웅변보다 묘한 울림을 가슴 속에 남겨준다.

 

대산세계문학총서로 <묵동기담>이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설마 달랑 한 편만을 수록하지는 않을 것으로 기대하며, 본격적인 나가이 가후의 작품을 접할 수 있게 되길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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