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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색야차
오자키 고요 / 범우사 / 1992년 9월
평점 :
절판
번안소설 <장한몽>의 원작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장한몽>이 귀에 설면 ‘이수일과 심순애’가 나오는 소설이라고 하면 반드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한국을 빛낸 100인의 위인’이라는 동요에도 나올 정도라서 어린아이들마저도 알고 있는 인물들이므로.
오자키 고요는 일본 근대문학사에서 비중이 큰 인물이다. 초기 근대문학의 경향과 인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서 고다 로한과 더불어 소위 ‘고로 시대’를 열었으며, 겐유샤라는 문학 동호회를 결성하여 주도하였다.
그의 작품 중에는 이 <금색야차>가 매우 유명한데, 길지 않은 작가의 삶 중에서도 이 작품에 쏟은 노력과 시간은 가히 압도적이다. 1897년 그의 나이 31세 때부터 요미우리신문에 연재를 시작하여 단속적으로 이어지다가 1903년 37세에 결국 미완성으로 끝낸 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의 후반생은 이 소설과 함께한 삶이었다. 작품의 구성은 금색야차(전편/중편/후편), 속편, 속속편, 신속편으로 연결되는데, 신문 연재라는 상황과 예상치 못한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후속작을 요구하는 여론의 압박이 심했음을 알게 한다.
작품은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불멸의 주제와, 정신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 간의 대립이라는 당대 일본의 시류를 반영한 시대적 의식이 선명하게 대비되어 있다. 작가는 갈등 구조를 극한에 이를 정도로 철저히 몰고 가면서 대립적 색채를 두드러지게 하고자 애쓰고 있는데, 과유불급이어서 오히려 사실성을 놓치고 있을 정도다. 여기에 당대적 관점이 아닌 현대적 시각을 개입시키면 작가의 주제의식은 역으로 진부하기 이를 데 없으며, 구시대의 도덕률을 억지로 드높이는 게 아닐까 비판마저 나올 정도다.
미야에 대한 간이치의 배신감은 개인적으로 충분히 느낄 만하다. 비록 공식적으로는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간이치와 그녀는 부부의 연을 맺게 되리라고 자신들은 물론 보호자인 미야 부모도 암묵적으로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간이치가 바라보는 미야는 단순한 젊은 아가씨가 아니라 여인으로서 지녀야 할 숭고한 덕성의 표본이었으므로 다이아몬드에 넘어간 충격은 한층 더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이후 그의 자멸적 삶을 정당화 해주지는 못한다.
미야를 굳이 변호한다면, 그녀는 뛰어난 미모를 지녔지만 보통의 인성을 지닌 여인이다. 그녀의 내심은 부귀영화에 대한 환상과 기대를 품고 있었다[전편 제3장]. 오늘날 젊은 여성들이 갖는 백마 탄 왕자의 출현에 대한 몽상과도 동일하다. 그녀는 간이치에게 진정한 사랑을 품은 게 아니었다, 적어도 그를 버리고 도미야마와 결혼하기 이전에는. 그녀가 간이치에 대해 지닌 애정은 남녀 차원이 아닌 남매간과 가까운 것이었다. 그녀 자신도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 하였다. 그래서 미야는 별다른 고민 없이 쉽게 도미야마의 손을 잡았던 것이다.
“부부의 행복은 오직 이 애정의 힘에 달려 있는 거야. 따라서 애정이 없으면 이미 부부 사이도 끝난 거라 할 수 있지.” [전편 제8장]
부유하지만 애정 없는 결혼생활. 당대는 물론 현대의 수많은 남녀 군상들은 여전히 사랑보다 조건을 선택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이를 비판하기는 용이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네 부모 세대에 이르기까지 배우자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채 혼인을 치르지 않았는가. 열정적인 사랑은 없지만 부부 간의 은근한 애정은 상호 노력에 의해 충분히 생길 수 있다. 미야는 이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부귀영화의 욕구가 채워지니까 잠복해 있던 사랑의 욕망이 불현 듯 샘솟는 것이다[후편 제3장]. 여러 유한부인들이 남편 따로 애인 때로 있는 동기가 여기에 있다.
극도의 배신에 대한 분노의 표출 양태는 자기 발전과 자기 파괴의 상이한 행동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를 갈면서 분투노력하여 오히려 성공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간이치는 세상에 대한 불신과 체념, 그리고 자기 방기(放棄)로 나아간다. 그는 고리대금업자의 하수인이 되었다.
“고리대금과 같은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거의 사람을 죽일 정도의 배짱이 필요한 일을 날마다 다루면서 감정을 거칠게 하고 있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으니 고리대금이야말로 미친 사람한테는 안성맞춤의 장사입니다.” [중편 제2장]
여기서 소설은 세태 비판적 성향을 드러낸다. 간이치가 몸담고 있는 고리대금업의 세계와 생활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그들의 간교한 영업 사례를 보여주며, 그들에 대한 세간의 증오와 저주를 여과 없이 쏟아내고 있다. [중편 제8장, 후편 제1장, 이는 당대 일본이 자본주의화 되면서 고리대금업이 활발해지고 그 폐해가 증폭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미야와 간이치의 두 중심인물 외에 네 명의 개성적인 인물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며 작중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을 통해 작품 전개는 더욱 흥미진진해지면서 주인공을 한층 두드러지게 하며 작가의 주제의식은 더욱 선명해진다.
미야의 남편인 도미야마. 그는 사실 피해자이며 악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는 미야와 간이치의 관계를 알지 못한 채 결혼 하였다. 결혼 후 미야에 대한 그의 나름대로의 노력과 헌신은 차라리 눈물겨울 정도다. 만약에 미야가 도미야마에게 조금만 마음을 열었더라면 그는 한층 훌륭한 인물로 성숙해졌을지도 모른다. 달면 삼기고 쓰면 뱉는 듯한 미야의 처사에 오히려 반감이 생겨서 도미야마의 타락에 미움보다 동점심이 일 정도다.
고리대금업자 와니부치. 그는 글자그대로 전형적인 고리대금업자의 화신이다. 그는 자신의 직업에 일말의 의구심과 회의감을 품지 않으며 전혀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 아들의 눈물어린 호소마저 외면하면서 오히려 고리대금업의 불가피성을 토로하는 그의 대사를 듣고 있노라니, 요즘 모 대부회사의 광고가 생각난다. 사람이 바쁠 때는 버스나 지하철이 아니라 비싸더라도 택시를 이용하는 게 필요하다는, 뭐 그런 거 말이다. 어쨌든 와니부치는 표리부동한 위선자와는 다른 철저한 악인다움의 구현이라는 면에서 역설적으로 흥미로운 인물임은 분명하다.
간이치의 유일한 친구 아라오. 참사관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다가 갑작스레 파산하여 몰락한 인물. 간이치가 음(陰)의 속성이라면, 그는 양(陽)의 속성을 지닌 듯하다. 그는 처지에 실의 낙담하지 않으며 올곧은 마음 자세를 견지한다. 외양상으로는 거렁뱅이나 광인에 가깝지만 그의 두 눈은 여전히 부리부리하며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러기에 그의 마음은 두 남녀에 대한 안타까움과 끊지 못한 애정으로 여전히 아프다.
고리대금업자 미쓰에. 작중에서 그녀만큼 간이치에게 하대와 구박을 받는 인물이 달리 있을까? 그녀의 미모와 재산이라면 어찌하든 접근하려는 남자들이 수없이 많을 텐데. 그녀는 일편단심 간이치를 향한다. 그에 대한 그녀의 마음은 분명코 순정이며 연정이다. 보지 못하고 겪어보지 못한 미지의 존재에 대한 성취될 수 없는 갈망은 더욱 몸 달게 하기 마련이다. 그녀는 결코 다소곳하고 정적인 성격이 아니다. 간이치가 그녀를 거부하는 이유는 단지 하나, 자신의 가슴 속에 여전히 미야가 가득 자리 잡고 있어서다. 미야에 대한 사랑이 증오로 바뀌었지만 그 크기는 전혀 줄지 않았다. 그가 진실로 미야를 버렸다면 서슴없이 미쓰에를 받아들이지는 못하더라도 그렇게 박정하게 외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신처럼 하찮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결코 물질적 조건에 대한 편애는 아닐 것이다. 아쉽게도 미쓰에의 행로가 향후 어떻게 전개될지는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작품은 중단되고 말았다.
간이치는 휴양지 여관에서 사야마와 게이샤 아이코의 사랑을 위한 죽음을 시도하려는 장면을 목도하고 세상과 여인과 자신에 대한 인식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는다[속속 제5장]. 이후 신속편에서 미야의 구구절절한 심경을 토로한 서신에서 작품을 완결되지 못하고 끝을 맺는다. 차라리 이편이 낫다. 구질구질하게 해피엔딩을 만들려고 애쓰거나 괜히 개과천선한 간이치의 훌륭한 선행을 억지로 독자에게 보여주려는 작가의 고심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괜찮다.
이 작품은 근대 우리 문학계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번안된 인물이지만 이수일과 심순애가 여전히 우리네 세계에 살아있다는 자체가 이를 증명한다. 작가 특유의 세련된 감각적 표현과 감상적 문체는 작품에 애상미를 고취하고 있으며 이는 일본문학의 전형적 특성으로 자리 잡는다. 현대에 와서 많은 신진 작가들이 역시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서 문학적 세례를 받았던 것처럼 당대의 오자키 고요 또한 그러했던 것이다. 어쨌든 우리에게는 결코 바람직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