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일족
모리 오가이 지음, 노재명 옮김 / 북스토리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수록작>
1. 아베일족
2. 사하시 진고로
3. 사카이 사건
4. 산쇼대부
5. 다카세부네

 

모리 오가이의 역사소설 모음집으로서 출판 컨셉이 뛰어나다. 오가이는 작품 활동 후기에 이르러 집중적으로 역사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흔히 역사소설이라고 하면 장편이나 대하소설을 연상하기 마련인데 오가이는 단편이나 중편만을 쓴다. 전업 작가가 아닌 만큼 장편을 쓸 물리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을 것이며, 특정 시대나 사회 전반을 포괄하기보다 개별 사건을 서술하기 위해서는 굳이 길게 쓸 필요도 못 느꼈을 듯하다.

 

기존에 읽은 작품들은 건너뛰고 처음 만나는 두 편 <사하시 진고로>와 <사카이 사건>만 읽는다.

 

<사하시 진고로>는 특이하게도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기를 배경으로 하며 당시 조선 왕조도 작중에 등장한다. 사하시 진고로라는 무사가 훗날 조선 통신사 일행의 교첨지로 변신한 사연이 작품의 기본 스토리다. 일본의 사무라이, 즉 무사는 칼질이나 제법 잘하는 낭인들이 아니다. 나름대로 엄격한 위계질서와 규범체계를 갖춘 계급집단이라고 해야 옳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규율을 지키면 커다란 명예가 따라오지만, 사소하더라도 규칙을 위반하며 불명예의 낙인이 찍힌다.

 

사하시 진고로는 촉망받는 청년 무사에서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이유는 동료와 상관의 약속 이행 거부이다. 동료가 자신의 약속대로 아깝지만 칼을 양도했더라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색안경을 쓰지 않고 그의 충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면 사하시 진고로는 목숨을 바쳐 섬기는 훌륭한 무사가 되었을 것이다.

 

진고로가 수치-남색(男色)의 대상이 되는-를 감수하면서까지 임무를 완성한 것은 오로지 동료 살해의 죄를 씻고자 하는 일념이었다. 도쿠가와는 표면에 나타난 행위만을 중시하고 진정한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단견을 드러내었고 끝끝내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한다.

 

<사카이 사건>은 일본 개항기 시절 일본군과 프랑스군의 교전 사건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메이지 천황의 사망에 잇따른 저명 인물들의 할복에 충격을 받은 오가이는 <아베일족>과 이 <사카이 사건>에서 집중적으로 할복을 다룬다. 전작에서 할복에 대한 작가의 태도는 중의적이었다. 할복 자체는 높이 평가하지 않으면서도 할복 문화의 불가피성 내지 일정 필요성은 인정하였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할복 행위 자체에 보다 집중하며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우연하게 발생한 양군의 충돌로 프랑스군이 피해를 입자 국제적 사태로 확대되는 것을 꺼린 정부는 프랑스 측의 요구를 수용한다. 교전을 벌인 일본군 중 20명을 사형에 처하는 것이다. 일본군으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군인으로서 최선을 다한 결과에 대해 포상은커녕 오히려 사형을 받게 되다니.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전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당사자들의 강력한 반발과 정당한 명분에 정부는 그들을 무사로 인정해주고 할복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후반부는 할복 행위에 대한 사실적으로 세세한 기술을 통해 그들을 표면상 죄인이지만 당당한 영웅으로서 찬양한다.

 

할복은 지극히 일본적인 행동방식이다. 우리네 조상들은 자진(自盡)할 때 독약을 마시거나 목을 매달았다. 할복은 죽음을 정면으로 대면하고 과감히 도전하는 행위다. 할복하면서 비겁하거나 유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만큼 치욕의 대상이 되는 게 드물 것이다. 어찌 보면 가슴속에 지독한 독기를 품은 사람들만이 이런 극단적인 죽음의 양태를 선택할 수 있다. 더욱이 할복은 홀로 하지 못한다. 뒤에서 단칼에 목을 쳐줄 동료를 필요로 한다. 할복하는 본인은 물론 동료마저도 본인에 못지않은 굳센 각오와 의지가 필요하다.

 

오가이가 역사소설을 쓰게 된 내밀한 심리상태 가운데 나이 50이 넘어서 사고가 자연스럽게 보수적으로 흘러갔을 가능성을 무조건 배격하지 못할 것이다. 젊은이는 진보적이고 노인들은 보수적인 현상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보편적이다. 오가이는 젊어서 독일 유학에서 체득한 근대화된 정신으로 당대 일본사회를 재단하였으나 이제는 일본 고유의 미덕을 찾고 드러내는데 주력한다. 물론 이것이 단순한 회고 내지 의고조의 태도는 아닐 것이다. 일본 전통의 좋은 점을 당대에 널리 주창하여 혼란스런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적 가치관으로 삼고자 하는 원대한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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