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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오가이 단편집 ㅣ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모리 오가이 지음, 손순옥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6월
평점 :
<수록작>
1. 무희 (舞姬)
2. 마리 이야기 [허무한 이야기]
3. 아씨의 편지 [편지 배달부]
4. 인신매매 산쇼 다유 [산쇼 대부]
5. 최후의 한마디
모리 오가이는 나쓰메 소세키와 더불어 일본 근대문학의 제일인자로 인정받는다. 그의 이력을 보면 당대 여타 작가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점이 있는데, 그 군의관 자격으로 독일로 유학을 다녀왔으며 군의총감이라는 최고직위까지 역임하였다. 그의 작품이(특히 초기작의 경우) 독일을 무대로 배경을 삼고 있는 것이 이에 연유한다. 게다가 공직에 바쁜 그가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했으리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이 단편집에 수록된 다섯 편의 공통적 특징은 모두 젊은 여성, 십대 후반의 아가씨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데 있다. 다만 시기적으로 첫 세 작품은 초기에, 나중 두 작품은 후기에 씌어졌고, 공간적 배경도 독일과 과거 일본이라는 차이점을 보인다. 작가가 젊은 여성을 주된 인물로 설정한 것은 우선 자신이 아직 이십대인 만큼 사랑이라는 소재에 관심이 쏠렸다고 이해된다. 봉건적이고 전제적 지배 체제 아래 놓여 있는 일본의 여성들에 비해서 서양 여인들의 처지와 자각 정도는 상대적으로 낫다고 볼 수 있다. 독일 삼부작에서 여주인공들은 독립적 정신의 소유자다. 그들은 가부장적 체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또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설 줄 안다.
오가이의 초기 단편들이 인기를 끈 요인 중 하나는 이국정서에 대한 기대감이 아니었을까. 근대화와 서구화를 시작한 일본이지만 서양 본토까지 유학을 하는 사례는 일반적이지 않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서구인과 서구문화에 낯설다. 이때 누군가가 문학적으로 아름다우며 깔끔하게 정돈하여 그네들의 사회와 문화를 보여줄 수 있다면, 그리고 스스럼없이 의사소통을 하고 여인들과 사랑까지도 속삭일 수 있다면 대중의 흥미는 매우 높아질 것이다.
삼부작을 통해 오가이의 초기 문학적 특질을 알게 된다. 단정하면서 군더더기 없는 문장.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으면서도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말미. 예스러운 멋조차 느껴지는 낭만주의적 분위기, 은연중 배어나오는 따스한 휴머니즘과 봉건질서에 대한 거부감. 그러면서도 기성체제에 편입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체념과 순응의 심적 태도.
삼부작은 일본적 특색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보편성을 체현하였다. 작중 인물만 우리 것으로 바꾸면 국내 작가의 작품이라고 소개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것은 모리 오가이가 서구 문화의 세례를 받은 입장에서 아직 일본 고유의 독자적 개성을 발견하지 못한 시기인 듯하다. 이런 면에서 나중 두 작품은 삼십 년이 지난 후 쓰여진 만큼 초기작과는 완연히 다른 색채를 띤다.
<산쇼 다유>에서 안주는 강제적 노비의 삶을 탈피한 방법은 탈출 밖에 없다고 판단한다. 동생 즈시오의 도주를 돕기 위해 자신은 기꺼이 목숨을 던진 과감성과 결단력은 여느 성인 남자들에게서도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강인한 행동이다. <최후의 한마디>는 더욱 두드러진다. 참수형에 처하게 된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수령에게 탄원서를 올리고, 차가운 어조로 최후의 진술을 담담하게 내뱉는 사사는 더 이상 연약한 어린 소녀라고 하기 어렵다. 조정은 틀림없이 올바른 판단을 내릴 것이며, 그렇지 못한 조정은 올바르지 않으므로 따를 수 없을 것이라는 단호한 결의가 한마디에 내포되어 있다.
“안주는 오늘 아침도 부처님이 사방으로 내뿜는 듯한 밝은 빛의 기쁨을 이마에 띠고 큰 눈을 빛내고 있다.” (P.135)
이것은 동생 즈시오와 영원한 작별을 목전에 둔 안주를 묘사한 대목이다.
“......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눈은 차가웠고, 그 말은 차분했다.......앞서와 같은 차가운 어조로 대답했는데,” (P.170)
관원의 취조와 고문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주저함 없이 당당하게 진술하는 사사의 모습이다.
안주와 사사에게 닥친 운명의 타격은 심대하기 그지없다. 그저 절망과 비탄에 빠져 어찌할 줄 모른 채 소리 높여 울부짖더라도 일견 자연스러울 정도다. 도리어 그네들은 절제된 항상심을 갖추고 거칠고 잔인한 외부 풍파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또는 침착하게 받아들인다. 이제 일본의 여성들도 주체성을 당당히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