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코트 심해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7
아서 코난 도일 지음, 이수현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독가스대>는 <잃어버린 세계>의 후속작이다. 챌린저 박사를 포함한 주요인물 4인이 그대로 등장하는 챌린저 시리즈의 하나다. 분량 상으로는 중편에 해당한다. 시간적으로는 전작의 수년 후, 장소는 런던과 근교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스펙트럼의 프라운호퍼 선이 흐릿하게 보이는 현상에서 에테르의 변화를 추론하고 이것이 지구상의 생명체를 파멸로 몰아넣을 것으로 예측하는 챌린저 교수의 주장은 거침없는 쾌도난마와도 같다. 의문점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들이면 이후에 전개되는 모골이 송연하고 오금이 저리는 인류역사상의 일대 재난을 경험하게 된다. 작가의 비길 데 없는 장점, 즉 독자를 자신의 글에 몰입시키는 능력은 여전하다. 일견 평범한 글쓰기로 오인될 수 있지만 점층되는 긴장의 제고와 심화되는 사건의 전개, 그리고 증폭되는 이야기의 재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야 가능한 수준이다.

 

챌린저 박사가 말하는 에테르는 서양의 근대 과학사 및 철학사에서 한때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던 개념이다. 코난 도일의 당대에는 다소간 생명력을 유지하였으나 아인슈타인 이후 완전히 종말을 고하였다.
“그것은 빛이 전해지는 매질, 항성으로부터 항성으로 퍼져 있으며 전 우주에 고루 퍼져 있는 미세한 에테르의 변화일 수 있을 것이오. 우리는 에테르의 대양 깊숙이에서 느린 해류를 타고 떠다니고 있소.” (P.159)

 

에테르의 변화로 발생한 교란은 모든 사람에게 서서히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며, 그것은 사람들의 언행이 평소와 달라진 점이다.
“오늘은 모든 게 이상해 보였다. 모두가 기묘하고 예기치 않은 말을 했다. 꿈 속 같았다.” (P.172)

 

코난 도일이 전 인류의 절멸이라는 거대하고 극단적인 현상을 제기하면서까지 보여주고자 하는 점은 챌린저 교수와 서멀리 교수의 언쟁 속에 나타난다. 지구상에서 인류라는 존재는 최후의,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은 독단 혹은 독선일 수 있다. 인간은 자연과 타 생명체 앞에서 더 겸손할 필요가 있다. 한바탕의 끔찍한 해프닝으로 결론 났지만, 작가가 굳이 ‘위대한 각성’이라고 표현한 연유가 있다. 유사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인류는 자신이 얼마나 무력하고 무지한 존재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20세기 초의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의 발전과 사회 진보에 대한 낙관적 믿음은 이 작품이 발표된 지 불과 일년 후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독가스대와도 같은 재난과 마주쳤다.

 

같은 영국을 배경으로 한 단편 <하늘의 공포>는 순전한 상상력이 더 가미된 작품이다. 조이스 암스트롱이라는 비행사의 유고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3만 피트 이상의 특정한 상층 대기(작가가 공중 정글이라고 표현하는) 속에 존재하는 괴물을 다룬다. 대기 상층부는 물론이고 대기를 벗어난 우주 탐사가 빈번해진 현시점에서는 가정의 근거 자체가 희박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아직은 비행기의 이용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고 성능도 취약한 시절임을 염두에 두면 당대의 독자에게는 충분히 실감나게 다가왔을 소재일 것이다.

 

코난 도일은 여기서 비행에 관한 상당한 지식을 보여준다. 단발기가 서서히 고도를 높이면서 조종사가 받는 인상과 겪게 되는 현상이 매우 사실적으로 기술되어 있고 점층적으로 긴장을 높이는 효과를 주고 있다. 상당히 긴 비행 대목은 분량 면에서도 또한 작가가 기울인 공력을 감안하더라도 이 작품의 핵심이라고 해도 마땅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미지의 존재나 현상에 공포를 품는다. 밤, 심해, 정글, 죽음과 사후 세계 및 영혼 등. 여기에 하늘과 우주를 추가하더라도 하등 이상하지 않다. 알지 못하는 것은 친구인지 적인지 판단할 수 없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최선보다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생존의 법칙이다. 코난 도일은 인간의 약점과 본능의 틈을 잘 헤집고 들어간다.

 

<마라코트 심해>는 작가의 말기작이다. 서양의 아틀란티스 전설과 심령학을 교묘하게 결합한 경장편 분량의 해양 모험소설에 해당한다. 마라코트 박사와 화자이자 필자인 헤들리, 기계공 스캔런이 모험을 겪는 인물이다. 창조된 캐릭터는 챌린저 시리즈의 4인방에 비하면 개성과 매력도가 뒤떨어진다. 과학소설의 조건 중 하나인 과학적 근거도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해저 2만5천 피트 아래의 심해를 일반적인 강철로 제작한 탐사선을 타고 내려갈 수 있으며, 그곳에서 사람이 특수 장비 없이 유영이 가능하다는 설정도 그러하다. 작가는 마라코트 박사의 입을 빌어 압력이 의외로 심하지 않다고 주장하지만 말이다. 한편 심해가 원생생물의 부패로 인한 가스 빛으로 의외로 어둡지 않을 수도 있다는 주장은 참신한 맛이 있다.

 

이 작품의 묘미는 심해의 온갖 기괴한 생물을 상상에서 현실로 불러오는 신기함과 호기심에 있다. 게와 바다가재의 중간형태의 거대한 생물, 거대한 담요고기, 몸길이 30피트의 검정 가오리, 길이 200피트 정도는 되는 바다뱀, 녹색 도끼비불 같은 프락사, 거대한 전기 바다 민달팽이, 심해판 피라냐인 하이드롭스 페록스 등. 그리고 아틀란티스 전설. 일찍이 플라톤이 제기한 전설은 곧 잃어버린 고대 문명과 결부되어 강인한 생명력을 현재까지 드리우고 있다. 철학자 베이컨도 관련 저작을 남긴 바 있다. 도일은 아틀란티스의 풍요와 타락, 그리고 최후를 사고 영상의 형식을 빌려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으며, 살아남은 후손들이 건설한 심해의 아틀란티스의 묘사에 사실성을 부여하고 있다.

 

작품의 마지막 7장은 ‘검은 얼굴의 군주’와의 대결이다. 말년에 코난 도일이 심취한 심령학의 영향이 여기서 매우 강하게 드러난다. 아틀란티스를 파멸로 몰고 갔던 악마가 거대한 폐허의 신전에서 되살아나서 고대문명의 후손마저 절멸시키려고 한다. 흑마법과 백마법의 대결이라!

 

코난 도일은 종종 작품 속에서 당대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아틀란티스 전설을 소개하면서도 교훈을 끌어낸다. 이것이 양차 세계대전을 사이에 둔 유럽의 정세를 감안할 때 예사롭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과민한 소치인가.

 

“아틀란티스 인들의 흥성과 몰락으로부터 배운 교훈은, 국가에 닥칠 수 있는 가장 큰 위험은 그 지력이 영혼은 앞지를 때 온다는 것이다. 이 구문명을 파멸시킨 것은 바로 그러한 위험이었고, 어쩌면 우리의 종언 또한 그런 식으로 닥칠지 모른다.”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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