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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아노스의 진실한 이야기 ㅣ 아모르문디 세계문학 1
루키아노스 지음, 강대진 옮김, 김태권 그림 / 아모르문디 / 2013년 4월
평점 :
<수록작>
진실한 이야기 1
진실한 이야기 2
저승 가는 길, 또는 참주
카론, 또는 구경꾼들
죽은 자들의 대화
꿈, 또는 루키아노스의 생애
서기 2세기 로마제국 시대의 풍자작가 루키아노스의 주요 작품집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진실한 이야기>가 유명한데, 환상문학 또는 SF문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진다. 옮긴이는 서문에서 독자들이 루키아노스라는 이름을 이 책에서 처음 접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다행히도 나는 이 작가의 이름과 대표작에 대한 정보를 이미 접하였다. 즐겨 참조하는 <세계문학사 작은사전>(김희보 편저)에 작가에 대하여 흥미롭게 소개되어 있어서. 요는 이러한 작품이 과연 척박한 국내 출판시장에서 번역의 빛을 볼 수 있을지에 회의적이었는데, 따라서 이 책의 출간 소식을 접하고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서양 고대의 희랍어와 라틴어 원전 번역이라고 항상 근엄하고 고답적이며 격조 높은 저작들만을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당대 사람들도 오늘날의 우리들과 사는 양태는 별로 차이가 없을 것이다. 희로애락을 지니고 미신과 종교 사이에서 방황하며 행복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 치열하게 분투하는 인간의 본질. 원전 번역이 표준적 텍스트에 집중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보다 다변화되어 이처럼 인간적인 작품들도 많이 다루어주기를 바란다.
<진실한 이야기>는 방랑과 환상의 모험담이다. 이는 서양문학사의 많은 작품들을 떠올리게 하는데, 희랍신화의 헤라클레스와 오뒷세우스의 방랑, 켈트 신화의 쿠훌린(?), 후대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세르반테스의 마지막 소설 <사랑의 모험>, 콜로디의 <피노키오> 등. 고대인의 사유와 상상력이 얼마나 풍성하고 자유로왔는지 루키아노스는 잘 보여준다. 희랍의 철학자와 작가들을 마음껏 인용하고 변용하는 데서 그의 지적 역량이 출중함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는 모험담에 치중하고 있어 날카로운 풍자성은 다소 덜한 편이다.
그는 포도주 섬나라, 공중에 떠있는 섬들, 달나라, 거대한 고래 뱃속 세상 등 온갖 기묘한 세계를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묘사한다. 후편에서는 얼음나라에 갇혔다가 ‘행복한 자들의 섬’이라는 선인들의 사후 세상도 방문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순전한 가공임을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당대의 몇몇처럼 겪지도 않은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꾸며내어 진실이라고 우기지 않는다. 작가는 독자들에게 이 이야기들을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애당초 존재할 수도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결코 믿어서는 안된다고 친절한 당부조차 아끼지 않는다. 이렇게 자신이 이야기의 허위성을 스스로 인정하으므로 이제 그의 발언은 진실하게 된다. 그래서 <진실한 이야기>라는 역설이 성립한다.
<저승 가는 길, 또는 참주>와 <카론, 또는 구경꾼들>은 짤막하면서도 풍자적 재미가 뛰어나다. 당대인들은 죽어서 사후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헤르메스의 인도로 뱃사공 카론이 모는 배를 타고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강을 건너야 한다고 믿었다. 죽음 앞에서는 생전의 제반사가 모두 덧없기 마련이다. 부귀도 영화도 명예도 지위도 삶과 죽음의 껍데기에 불과하다. 죽음은 오로지 적나라한 본연의 것만 허용한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여전히 아귀다툼에 골몰한다. 인간의 유한함과 부질없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루살이마냥 한치 앞도 모르면서 싸우고 죽고 죽인다. 저승의 카론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며, 도대체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이승의 삶이 그토록 아름답고 행복하다면 모르겠지만, 일생을 천대받고 병들고 굶주림에 허덕이면서도 사람들조차도 저승을 앞두고 몸부림을 치며 대성통곡한다.
“그들이 만일 처음부터, 자신들이 필멸의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이 짧은 시간 동안 삶에 머문 후에 모든 것을 땅 위에 남기고, 마치 꿈에서처럼 떠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의식했다면, 좀 더 현명하게 삶을 살아갈 것이고 죽을 때도 덜 괴로워할 텐데 말입니다.” (P.145)
<꿈, 또는 루키아노스의 생애>는 자전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 흥미롭다. 작가는 꿈 속 여신들의 논변을 통해 직업 선택과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표어가 여전히 주창되고 있지만 당위성에 불과하지 현실은 엄연히 귀천의 차이를 두고 있다. 예외를 인정한다면 교육의 양과 질이 곧 직업의 수준을 결정하며 이는 곧 지위와 명예, 나아가 빈부의 차원마저도 좌우하기 쉽다. 교육의 여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키아노스가 얼른 기술의 여신을 외면하고 등돌린 것은 당연하다. 서글픈 현상이지만 당대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것이 여전한 진실이다.
<죽은 자들의 대화>는 <진실한 이야기>와는 다른 의미에서 뛰어난 작품이다. 전작이 모험담인데 비해 후자는 대화편이다. 25편의 짤막한 대화편에서 저승세계의 여러 영혼들과 신들이 등장하여 다채로운 이야기를 전개한다. 핵심 주제는 마찬가지로 사후 세계의 시각에서 볼 때 생전의 부귀와 지위는 무의미하며, 소박한 삶으로 순수한 본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루키아노스는 희랍 철학에서 에피쿠로스학파와 견유학파를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하며, 소피스트들과 같은 철학자와 수사학자에 대해서는 사기꾼이라고 부를 정도로 비판적이다. 제10편 ‘카론과 헤르메스의 대화’에서 철학자와 수사학자의 허위와 가식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진다.
<저승 가는 길, 또는 참주>에서는 퀴니스코스가, 여기에서는 메닙포스와 디오게네스가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그들은 거리낌이 없다. 하루빨리 이승을 벗어나 저승을 오지 못해 안달할 지경이다. 속세에 가진 것 없고 속박된 게 없으니 그들은 자유롭다. 모든 이가 괴로워 눈물을 흘리는 와중에도 그들만이 활기차고 호탕한 웃음을 날린다. 이들은 저승의 신들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제11편 ‘크라테스와 디오게네스의 대화’ 중 한 대목은 루키아노스가 중시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크라테스: 정말 필요했던 것은, 당신은 안티스테네스에게서 물려받았고, 저는 당신에게서 물려받았으니까요. 그건 페르시아 제국보다 훨씬 더 크고 존엄한 것이었죠.
디오게네스: 뭘 하는 건가?
크라테스: 지혜, 자율성, 진리, 거침없는 발언, 그리고 자유입니다.” (P.218)
<에라스무스 격언집>과 마찬가지로 여기도 삽화가 들어 있다. 옮긴이와 삽화가가 전작과 동일하다. 전작의 삽화는 개인적으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삽화가의 지향점과 나의 중시점이 어긋났다. 여기서는 삽화의 존재도 인식 못하였다. 곳곳에 있는 그림은 당대의 신화를 그린 그림들로 생각하였다. 그만큼 고전의 분위기와 성격에 완전히 부합하여 전혀 이질감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삽화는 양날의 칼과도 같다. 이 책에서는 올바른 방향으로 칼이 휘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