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 신개정판 생각나무 ART 7
손철주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 외에 가볍게 읽을거리가 없나 하고 서가를 뒤적거리다가 오래전에 사놓은 이 책을 꺼내게 되었다. 본디 예술에는 문외한이지만 미술에 대해서는 완전한 까막눈이다. 그저 동서양의 세계적 명화를 보면 ‘좋은’ 그림인가 보다 짐작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좋은’ 그림의 객관적 기준은 없다고 생각한다. 극단적으로 따지자면 천만 사람이 명화라고 칭송하더라도 그것이 내 맘에 들지 않으면 ‘좋은’ 그림이 아닐 것이다.

 

모든 게 그렇듯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아는 만큼 가깝게 된다. 친숙해지면 단지 스쳐지나가는 무수한 이름 없는 현상에 불과하였던 존재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장점과 미덕을 홀연히 깨닫게 된다. 예전에 탈무드에서 읽었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유대인들의 언어에서 알다와 사랑하다는 같은 어휘라고 한다. 미술 감상에서도 이것은 참이다.

 

저자는 서문에 말한다.
“이 글들이 미술의 정체를 밝히고 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오히려 변방에서 들리는 소식에 가깝지만 미술과 가깝게 지내려면 이 정도의 소식도 보탬이 될 날이 있을 것이다.” (P.9)

 

병법에서 강력한 적군을 상대할 경우 때로는 정공법보다도 우회전술이 효과를 거둘 수도 있다고 한다. 인간이란 일화, 에피소드 등 말랑말랑한 내용이 더 솔깃하고 기억에 오래 남는다.

 

서양미술, 특히 회화사에서는 사진의 발명이 시대적 구분의 기준이 된다. 자연과 사물을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고자 하는 미술은 존재 의의를 상실한다. 객관적 재생이 소멸하고 주관적 재현이 화두로 자리 잡게 되었다. 주관성의 극단은 추상표현으로 나아가지만, 사실을 배제한 주관은 사상누각이다. 예술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사실을 둘러싼 상상과 감정이다. 저자가 꿈을 버린 쿠르베를 반쪽 진실로 평가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현실과 꿈이 한 겹을 이룰 때 회화의 진실은 유통된다.” (P.58)

 

난 여전히 현대미술에 호감을 갖지 못한다. 앤디 워홀의 팝아트도,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도,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도 거리감을 느낀다. 백번 양보해서 미술사적으로는 특기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예술이란 항상 새로움에 목말라 있으니. 소비자로 하여금 신제품을 구입하도록 끊임없이 퍼부어대는 광고는 산업적 관점에서 필수적이다. 예술 산업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질문. 새로움이 곧 예술적 가치를 담보하는가? 그것이 ‘좋은’ 그림에 대한 보증서는 아닐 것이다. 나만의 감식안 계발이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단지 고루한 묵수(墨守)적 태도가 아니다. 여러 미술적 지식을 축적하고 많은 미술작품 감상을 통해 수준이 높은 작품과 아닌 것을 판별하고, 그 중에서도 자신의 취향에 부합하는 작품을 선별하는 안목, 그것이 평범한 미술애호가로서 갖출 수 있는 최상의 자질이 아니겠는가.

 

비단 전통적 명작과 대가의 작품만이 좋은 작품은 아닐 것이다. 그런 작품들은 대개 일반인이 구입하기에는 지나치게 고가이다. 모사품으로 대치할 수도 있으나, 존 러스킨의 <예술경제론>에 따르면 이는 미술계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몰지각한 행위다. 결국 우리네 뭇사람들은 무명화가나 대가의 저평가된 작품 중에서 ‘좋은’ 그림을 발굴해 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가까이는 감성과 정서를 풍부히 하는데 도움이 될뿐더러 혹시 아는가? 훗날 불세출의 대가로 추앙받아 의외의 재테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훌륭한 예술작품(음악, 미술 등을 포괄하여)은 깊은 정신적 함의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굳건히 믿었다. 내재된 예술가의 고뇌와 정신성의 깊이가 작품에 불멸의 의의를 더해준다고 생각하였다. 헨델, 텔레만, 비발디 보다는 바흐가 위대하고, 베토벤이 악성(樂聖)으로 추앙받는 것이 당연하였다. 연주자와 그 해석도 마찬가지였다.

 

동양화에서 사군자(四君子)는 단순한 그림의 소재 이상의 지위를 지닌다. 문인 화가들은 여기에 소위 정신성을 혼신을 다해 불어넣었다. 추사의 세한도를 비롯한 그림들을 보면 솔직히 아마추어적이다. 대강 붓으로 몇 번 쓱쓱 해버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빈 여백을 메꾸는 역할은 평론가들의 몫이다. 나는 그저 스산함과 처연함이 좋다. 몇 잎에 불과한 난초와 대나무 그림을 바라보노라면 절로 마음이 평온해진다. 여기에 이론과 기법의 분석이 개재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아름다움(美)의 의미와 효용은 무엇일까? 예술은 순수한 아름다움만을 추구해서는 안 되는가? 피카소는 “새소리가 아무 의미 없이 아름답듯이 미술의 아름다움도 마찬가지”(P.331)라고 반문하였다. 그림은 그저 좋으면 그뿐이다. 사랑이 그러하다. 생면부지의 사람을 좋아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고 상대방의 외모와 학력과 가정형편 등을 일일이 재고 분석한 후 사랑의 념(念)을 품지도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전체가 모든 것이 단박에 가슴에 와 닿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최소한 그림에 대해서라도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하게 될 수 있도록! 그것이 이 책을 덮는 내 소박한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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