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판 세계문학전집 41

 

원제는 Point Counter Point . 라틴어에서 유래된 말로 음표 대 음표라는 의미를 지닌다. 음악용어인 대위법(counterpoint)의 어원이기도 하다. 대위법은 단선율의 화성적 전개가 아니라 독립적 다성부의 병행과 결합의 전개를 특징으로 한다. 다성부의 독자성을 인정하되 그것이 개별로 이산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 조화를 지향한다.

 

헉슬리는 음악기법을 문학작품에 직접적으로 도입하려고 시도하였다. 단일의 주인공에 의한 단일의 사건 전개를 가진 작품이 아니다. 거의 대등한 비중을 갖는 복수의 인물들이 각자 자신들의 삶과 사고를 드러내며 병행하거나 교차하며 나아간다. 그런 면에서 보편적인 표제의 번역어인 연애 대위법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 청춘남녀들의 연애와 사랑을 그린 소설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딱 좋은, 작품 성격과 방향과는 천양지차다. 물론 사랑이 중요한 화두이기는 하지만 중심 주제는 아니다. 따라서 굳이 번역하자면 삶의 대위법내지 인생 대위법이 적합하달까?

 

작품의 배경은 1920년대다. 미증유의 제1차 세계대전은 종전 후에도 여전히 유럽 각국의 사회와 정신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전쟁 후 확고한 평화가 정착된 것도 아닌데다가 사회의 혼란과 모순에 대한 다양한 사고와 해석들이 소용돌이처럼 휘감아 돌고 있었다. 소설의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로 혼란에 빠져 있다. 지난 세기에 바탕을 둔 전통적 세계관과 가치관에 안정적 근원을 두고 싶지만 이는 무너지고 말았다. 새로운 세기의 정체는 아직 명확한 실체를 알 수 없다. 정치면에서는 급진적 전체주의가 신흥세력으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사회면에서는 자본주의가 대중 속에 깊이 뿌리내리기 시작하여 빈부 격차라는 회피할 수 없는 모순이 더욱 심화되었다. 한편 과학기술의 발전은 더 이상 일부 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구조적 요인의 성격이 강화되고 있었다.

 

그들은 갈 곳을 모른다. 그들은 방황한다. 필립 쿼얼즈는 정신과 이성의 영역에서 허우적거린다. 그것이 그의 아내를 절망케 하고 반대되는 인간형인 에버라아드 웨블리에게 다가서게 만든다. 월터 비들레이크는 유부녀 마아저리를 꾀어내지만 여성적 매력이 빈약한 그녀에게 곧 멀어지고 섹시하고 육감적인 루우시 탠터마운트에게 이끌린다. 차라리 루우시는 현대적 가치관을 지닌 인물로 볼 수 있다. 그녀는 남성을 지배하길 원하며 남성에게 매달리기를 싫어한다. 사랑과 무관한 육체관계 및 찰나의 쾌락에 몰두하는 정경은 현대인들의 초상과도 흡사하다.

 

한편 그들의 부모인 존 비들레이크와 제네트 비들레이크, 시드니 쿼얼즈와 레이첼 쿼얼즈, 에드워드 탠터마운트와 힐다 탠터마운트도 모두 실패한 결혼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들이 법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그나마 그것이 사회적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고, 명예와 경제적 관점에서 안전하기 때문이다.

 

위선자 데니스 버얼랩과 비어트리스 길레이, 에델 코베트의 관계 또한 독자적 영역을 차지한다. 고상하고 독실한 체하는 버얼랩이 성적으로 미숙한 비어트리스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대목이 이 작품의 대미를 장식하는 게 매우 흥미롭다. 어떤 암시라고 할까?

 

일리지와 스팬드럴, 웨블리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별동대다. 일리지는 한미한 계급 출신으로 부르주아 계급에 적대감을 지니고 있다. 그의 적대감은 하지만 열등감의 표출이다. 그 또한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계급 상승을 꾀할 것이다. 스팬드럴은 작품 내에서 철저한 반()인간형이며, 철저한 음지의 인물이다. 그의 사고는 물론 웃음조차도 반사회적이다. 그가 웨블리를 살해한 것에 대한 명확한 동기는 설명되지 않는다. 일리지라면 모를까. 그가 마지막에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며 램피언과 벌이는 인간성에 대한 논쟁은 극적인 동시에 눈물겨울 따름이다.

 

작품 내 등장인물은 이처럼 대부분 하자를 지니고 있으며, 작가로부터 부정적 평가를 받는 인간형들이다. 예외가 있다면 마아크 램피언과 그의 아내 메어리 램피언이다. 헉슬리는 마아크와 메어리가 신분을 달리한 상황에서 만남을 갖게 된 사연을 친절하게 들려준다. 램피언은 뛰어난 소설가이자 화가이다. 그는 순수한 인간성과 자연을 찬미한다. 이성과 영혼에 함몰되지 않고 순수하게 자연 그대로의 몸과 감정을 긍정하는. 그에 따르면 사람들이 자연과 순수를 감추고 외면하면서 세상과 사회가 타락하게 되었다고 한다. 소설 속에서 그는 홀로 존재한다. 그와 필립, 그와 스팬드럴 등과의 논쟁을 통해서 그는 반기계적, 반과학적, 반이성적, 반종교적 가치관을 분명히 한다.

 

헉슬리는 이처럼 다양한 유형과 계층과 사고를 지닌 인물들이 당대 영국 사회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영위하는 삶의 과정을 글자그대로 대위법적으로 노정하면서 진지하게 묻고 있다. 진정한 삶이란 무엇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요인은 어떠한가를. 단지 사랑만이 아니다, 에로스적이거나 플라토닉 하거나를 떠나서. 그것이 이 작품을 연애 대위법이라고 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엘리너 쿼얼즈가 남편 필립에게 바라는 것은 단지 뜨거운 육체적 사랑이 아니다. 이성의 세계에 빠져서 감성의 존재를 상실한 남편에게 실망한 것이다. 그것은 따뜻한 포옹과 몇 마디의 말로써도 충분할 터인데.

 

헉슬리는 과학자 집안 출신답게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음은 곳곳에서 쓰이는 생경한 과학 용어로써 잘 알 수 있다. 그의 독특함은 과학의 한계와 위험성에도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중 작품인 <멋진 신세계>에서 확대되는 주제의식이 여기서도 이미 싹을 드러내고 있다.

 

인상적인 장면은 마지막 37장에서 램피언과 스팬드럴이 함께 감상하는 베토벤의 현악4중주 제15번곡에 대한 이해와 분석이다. <어떤 회복기의 환자가 신에게 바치는 애조곡에 의한 거룩한 감사의 노래>에 대해 스팬드럴은 신의 존재와 예수의 도덕의 우월함을 입증해주는 증거로 받아들이지만, 램피언은 오히려 천국이고 영혼의 생활이기에 현실에 추출한 가장 완벽한 정신적 추상으로 거부한다. 추상적 영혼이 아닌 일개 인간을 그는 옹호한다. 이어서 후반부 곡조의 기적적 선율에 대해 지나치게 훌륭하여 도리어 비인간적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떠한 삶을 영위해야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램피언의 화두이자 작가 헉슬리가 제기하는 질문의 요체다. 이것은 우리네들 모두가 여전히 풀지 못한 문제이기도 하다.

 

* 1984년에 번역 초판이 발행되어 19871228일에 21판이 발행되었으니 당시로서는 꽤나 인기가 좋았던 작품이다. 이제는 신간 번역이 없어서 30년이 지난 헌책만 중고서점에서 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새로운 감각과 충실한 연구 성과를 담은 새 번역본이 나오길 기대한다. 한편 빽빽한 조판으로 500면에 가까운 분량이니 요즘 같은 작고 얄팍한 판형이라면 거뜬히 두 권으로 분책이 가능할 것이다.

 

* 최근에 연애대위법 번역본이 동서문화사에서 출간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기쁜 일이다. (2013.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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