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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과 하루 - 토머스 모어 서한집, 토머스 모어 경의 생애
토머스 모어.윌리엄 로퍼 지음, 이미애 옮김 / 정원출판사 / 2012년 4월
평점 :
<유토피아>의 저자 토머스 모어의 삶과 사상에 대해 속속들이 알 수 있는 좋은 책이다. 기실 우리가 토머스 모어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실은 매우 미약하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로서 영국왕 헨리 8세의 이혼에 반대하다가 참수형을 당한 인물, 이 정도쯤. 이 책은 우리의 시야와 안목이 얼마나 협소한지 새삼 절감하게 만든다.
500쪽에 가까운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전반부는 토머스 모어의 서한집이다. 모어가 가족과 지인들에게 보내고 받은 서한들이 빼곡하게 실려 있다. 모어의 현전하는 127편의 편지 중에서 선별된 66편과 가족의 편지 6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분량 상으로도 400쪽에 가까워 이 책의 핵심을 이룬다. 후반부는 그의 사위 윌리엄 로퍼-토머스 모어가 지극히 아끼던 맏딸의 남편-가 쓴 모어의 짤막한 전기다. 행장(行狀)이라고 하는 편이 더 가까우리라. 굳이 순서를 정하자면 후반부의 전기를 읽은 후 서한들을 읽는 편이 이해에 보다 도움이 될 것이다.
모어의 삶은 외관상 굴곡과 부침이 두드러지지 않고 대체적으로 평온하였다. 일평생 법관으로 봉직하다가 최고 지위인 대법관에까지 오를 정도로 국왕의 신임을 얻은 그였다. 그런 그의 말년을 어지럽게 휩쓴 사건은 헨리 8세의 이혼 건이었다. 단순한 국왕의 개인사가 아니라 유럽의 정치 및 종교계와 밀접하게 연관된 사건으로 결국 영국 성공회가 출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혼 문제의 개입을 극구 피하려 했던 모어는 로마 교황이 아니라 영국 국왕이 영국 내 교회의 수장임을 선포한 수장령(首長令)에 선서하기를 거부한다. 그는 종교 지도자가 아니었고 은퇴하였으므로 현직 고위관료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국왕은 그의 선서를 강력하게 요구하였으니 모어의 당대적 비중이 매우 지대하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온갖 회유와 강압에도 그는 결국 죽음을 달게 선택하였는데, 그에게 이것은 정치와 종교적 관점을 떠나서 양심에 관한 중차대한 사안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유토피아>는 분명 흥미로운 저작이지만, 성격상 저자의 주관적이며 내밀한 감정과 사상이 온전히 드러나 있지 않다. 특정한 상대 또는 다중을 염두에 쓴 이 편지들은 그런 면에서 토머스 모어라는 세기적 인물의 생생한 면모를 자신의 육성과 필치로 직접 들어볼 수 있는 귀중한 계기가 될 것이다.
모어는 소탈한 성품으로 젠체하지 않는다. 가족과 지인에게 보내는 문구에는 유머와 따스한 애정이 깊이 배어있다. 용돈을 달라는 맏딸에게 더 많이 주고 싶지만 계속적으로 달콤한 요청을 받기 위해서 요구액만 주겠다고 답장한다. 에라스무스에겐 자신의 저술을 빗대어 인용하며 자신이 유토피아 왕국의 왕으로 지목되었다며 유쾌한 농담을 나열한다.
그와 에라스무스 사이의 우정은 각별하였다. 친우에 대한 세인들의 터무니없는 비판과 비방은 그는 좌시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옹호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마르턴 도르프에게 보내는 편지[15]와 수사에게 보내는 편지[83]다. 일반적인 편지와는 달리 이 둘은 상당한 분량으로 쓰였는데 전자는 70여 쪽, 후자는 40쪽에 달할 정도로 장문이다. 분량과 내용으로 보건대 공개서한 형식의 논문이라고 하겠다. 에라스무스 비판자들의 요지는 <우신예찬>에서 그의 신학자 비판이 그릇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그가 희랍어 원전에서 직역한 라틴어 성경을 두고 희랍어 텍스트의 신뢰성이 의심된다는 점이다. 세밀하고 정확한 논리로 상대방 주장의 오류를 지적하고 에라스무스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점에서 과연 법률가이자 신학자 못지않은 종교인인 모어의 능력을 엿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극한까지 다그치지 않고 상대방이 운신한 수 있는 여지를 남기며 슬쩍 추켜올리는 것은 과연 그다움을 느끼게 된다.
모어의 여성관 및 교육관은 당대로서는 매우 선진적이었다. 그는 남과 여, 지위 고하의 구분 없이 동등한 교육을 몸소 실행하였다. 그는 자신의 집을 학교라고 불렀는데, 하녀조차도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였을 정도다. 또한 여성을 무조건 폄하하지 않았다. 윌리엄 고넬에게 보내는 편지[63]에서 남녀 모두 인간으로서 이성을 지닌 존재이며, 학식을 통해서 이성이 계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6세기 초 절대왕권의 시대임을 염두에 두면 혁신적임을 알 수 있다.
모어 사상의 토대는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그의 이성과 양심 역시 건전한 믿음에 기반한다. 종교에의 경도(傾倒) 정도가 그와 에라스무스의 차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사도들에게 이어졌고 그 후대가 바로 로마 교황이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이해관계가 상이하여 대립될 수 있지만, 종교적으로는 그에 순응해야 한다. 그것은 교황 개인에 복종이 아니다. 공의회를 거쳐 공인된 교리와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루터 등 소위 종교개혁론자들을 거부한다. 그리스도 교단 내부적으로 존재하는 부패와 타락 등은 교회의 틀 내에서 바로잡으면 되지 그것을 빌미로 교황과 공의회의 적통성을 부인할 수 없다고 본다. 그가 츠빙글리의 죽음에 기쁨을 표시([189] 요하네스 코클라이우스에게 보내는 편지)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시각에서 분리론자들은 교회의 적인 것이다.
그의 입장은 헨리 8세의 이혼과 수장령 선포에도 여일하다. 국왕의 총신으로서 응당 수장령을 지지하고 선서해야 하였음에도 그는 이를 거부한다. 영국 의회의 법으로서 세계 보편의 법칙을 규제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며, 교황의 지상권은 불변의 권리임을 주장한다.
“모든 그리스도교 국가가 하나의 몸을 이루는데, 그것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 어떻게 그 몸 전체의 공동의 동의 없이 그 공동의 머리에서 이탈할 수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199] 토머스 크롬웰에게 보내는 편지)
이러한 사상의 내면적 발로가 그의 양심론이다. 신앙에 관한 문제는 개인의 양심에 속하는 사안으로 강압할 수 없다고 한다. 이 양심은 단편적이고 즉흥적인 성격이 아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내 양심은 갑자기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해서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서 끈기 있게 탐구하면서 형성된 것이라고 말이지.”([200] 마거릿 로퍼에게 보내는 편지)
“그것에 대해, 내 양심은 아주 오랫동안 부지런히 노력을 바쳐서 형성된 것이므로 나 자신의 구원과 일치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고 대답했단다.”([216] 마거릿 로퍼에게 보내는 편지)
그가 런던탑에 투옥되고 처형되기까지 일년 여 동안 그가 주고받은 편지의 기본적 화두는 바로 양심이다. 국가가, 군주가 지배할 수 있는 개인의 영역의 한계, 그것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며 이를 밝히기 거부한다는 이유로 처벌하는 행위의 부당성. 진실로 근대 이전에 이처럼 처절하고 철두철미하게 개인의 양심을 옹호하고 부당한 간섭을 배제하기 위하여 몸 바친 인물이 있었던가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유토피아>의 저자인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토머스 모어는 빙산의 일각이다. 그의 삶의 중요한 행로였던 법률가와 진실한 종교인의 관점도 그의 전모 파악에는 부족하다. 차라리 그는 인간의 고유한 가치를 인식하고 옹호한 최초의 근대적 인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실체는 의외로 거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