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브 공작부인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9
라파예트 부인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성대함과 정중함이 앙리2세 치세 말년만큼 프랑스에 눈부시게 나타난 적은 없었다. 왕은 우아하고 친절하고 다정했다. 디안 드 푸아티에, 그러니까 발랑티누아 공작부인을 향한 왕의 열정은 이십 년 전에 시작되었지만, 그때보다 덜 열렬하지도 덜 눈부시지도 않았다.”(P.9)

 

이 작품은 이렇게 시작한다. 해서체의 단정하고 우아한 문체는 작가의 특질을 그대로 전달한다. 급작스런 감정의 변화에 빠지지 않고 침착하며 조리 있지만 차갑지 않고 차근차근한 어투.

 

남녀 간의 애정사는 자고로 여러 문학작품의 끊이지 않는 샘이 되었다. 이는 유럽의 궁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서 왕 이후 궁정풍의 사랑은 훌륭한 기사의 필수 덕목으로 자리 잡았다. 더구나 결혼이 사랑이 아니라 이해관계에 따라 맺어진 경우 배우자와의 무심한 관계는 애인을 필수적으로 요구하게 되었으며 오히려 드러내놓고 자랑할 꺼리가 되곤 하였다. 이는 부정과 불륜으로 진전될 소지가 많았기에 도덕적 문제가 존재한다.

 

이 작품이 출판된 게 17세기 후반이며, 작품의 배경은 16세기 중반의 프랑스 왕정 체제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작품 속에 드러나는 여러 공공연한 부정의 정황으로 보건대 당대는 이미 도덕적으로 많이 허물어진 시기임을 알게 된다.

 

야망과 연애, 이것이 궁정의 정신이었고 사내들이건 여자들이건 하나같이 그 일에 전념했다......권태도 몰랐고 여유도 몰랐다. 쾌락에 혹은 밀통에 바빴다.”(P.23)

 

작품의 전반부는 대체적으로 프랑스 궁정 비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력을 잡기 위한 각 세력들의 비상한 합종연횡, 그리고 국제 정세와의 맞물림 등. 때문에 16세기 서양사, 특히 프랑스사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상당한 혼란을 겪을 정도다. 물론 라파예트 부인의 당대 독자라면 부연 설명 없이도 충분히 이해를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작가의 의도는 아마도 사랑과 야망[사업]이 이질감 없이 동거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비추는데 있을 것이다. 클레브 공작부인은 사랑을 모르는 채 결혼한다. 시장에서는 적당한 수요가 있을 때 얼른 거래를 성사시켜야 한다. 자칫하면 악성재고로 전락하게 된다. 클레브 공작은 부인을 열렬히 사랑하는데, 공작부인은 남편에 대한 존중과 호의만 가지고 있으니 비극은 여기서 배태되었다.

 

샤르트르 양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클레브 공작은 자기를 만족시킬 만한 감정을 그녀가 갖기에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그가 말하는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P.32)

 

애정 없는 결혼 생활도 현실에서는 영위에 어려운 것은 아니다. 사랑 외에 결혼 생활을 존속시킬만한 다른 요소는 충분하므로. 그런데 배우자가 아닌 인물에게 사랑의 감정이 눈떠지게 되면 매우 곤란하게 된다. 사랑은 이성으로 제어되는 게 아니다.

 

클레브 공작부인은 도덕적 정숙함이 남다르다. 그런 그녀는 사랑에 강하게 저항하지만 운명처럼 다가온 느무르 공에 대한 사랑은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녀의 마음에 깊게 스며들었다. 그녀의 부질없는 저항은 눈물겨울 정도다. 그녀는 결코 자신의 감정을 상대에게 표출하지 않았으며 비난받을 만한 행위도 저지르지 않았다.

 

클레브 공작부인은 이것이 자신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말에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았고, 그 말을 묵인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척, 그가 말한 여자가 자기라고 생각하지 않는 척해야 할 것도 같았다. 말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또 절대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P.81)

 

그녀는 자신의 감정 상태를 남편에게 고백한다. 사실 이건 매우 어처구니없는 행동이다. 모르는 게 약이며, 아는 게 병이라고 했던가. 제아무리 부부 간이라도 자신의 내밀한 감정까지 털어놓는 것은 오히려 원만한 결혼생활을 저해함을 그녀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다만 자신의 진정성과 정숙함을 남편이 이해하여 주기를 바랐을 뿐이다. 사랑에 이해는 없다.

 

당신의 고백은 너무나 고결해서 나로서는 당신을 전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소......당신은 그 어떤 아내도 남편에게 보이기 힘든, 가장 위대한 정직을 보여주었고, 그래서 나를 가장 불행한 남자로 만들어버렸소.”(P.139)

 

질투는 클레브 공작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그녀는 남편의 죽음의 원인이 자신임을 알고 커다란 충격과 절망과 자책에 빠진다. 어쨌든 남편의 사망으로 그녀는 혼자가 되었으며, 법적, 도덕적 장애물도 사라졌다. 그녀에 대한 느무르 공-뭇 여성이 질시할 만한 완벽한 남성-의 구애는 한층 집요해졌다.

 

그녀는 앉아 있던 자리에 두 시간이나 머문 후, 결국 그를 보는 것은 자신의 의무와 전적으로 상반되는 일이니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P.204)

 

이 작품은 16세기 프랑스 궁정사를 잘 보여주는 역사소설이며, 당대 상류층의 비도덕적 애정사를 비판하는 사회소설이다. 또한 클레브 공작부인의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변화를 미묘하게 그려낸 사랑소설이기도 하다. 여기서 작가는 격정의 분출 없이 절제된 어조와 행동 묘사를 통하여 공작부인과 공작, 공작부인과 느무르 공 간의 삼각관계에서 빚어지는 긴장과 갈등을 탁월하게 그려내고 있다. 매우 예민하고 위험한 소재임에도 구질거리지 않고 끈적거림 없이 담백한 뒷맛을 풍기는 것은 역시 작가의 솜씨일 것이다.

 

작품해설에서 알베르 카뮈가 이 작품의 빼어난 스타일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확실히 다른 작가 및 작품과는 구별되는 독특함이 한눈에 불쑥 다가오지는 않지만 은연중에 다름을 인식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