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메이드 픽션
박형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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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은 단편집의 제명을 대개 가장 핵심적인 단편작품의 표제를 그대로 가져온다. 간혹 수록작품들의 배경, 작품세계 등을 공통으로 아우를 수 있는 제명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분명 박형서는 후자의 예를 따랐다.

 

소설치고 핸드메이드가 아닌 것이 있으랴? 더욱이 픽션이 아닌 소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굳이 작가는 이 제명을 선택하였다. 그 연유의 추론은 곧 작가의 의도를 밝히는 첩경일 수도 있다.

 

소설은 분명 허구를 그린다. 하지만 작가가 소설 속에 그리는 인물과 사건, 배경 등은 완전한 허구가 아니다. 현실에 기반을 둔 그럴듯한허구인 것이다. 따라서 작가는 현실 세계의 많은 요소를 관찰하고 작품에 그대로 또는 가공하여 도입한다. 그래서 독자는 소설 속 내용을 그럴듯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박형서는 아니다. 수록된 8편의 단편들은 철저하게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들이다. 간혹 나타나는 인물과 배경 등의 현실성은 오히려 이질감을 두드러지게 하여 비현실성을 배가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그에게 있어 그럴듯함은 별다른 고려 요소가 아니다. 역으로 그럴듯하지 않음을 노리고 작위적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전개해 간다. 산신령과 물신령이 서로 싸우며, 호숫가의 커다란 바위 구멍에 머리가 끼어 죽는다든가, 고양이가 스스럼없이 사람처럼 행세하며, 금도끼은도끼 실험으로 산신령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시도 등은 얼핏 터무니없지만 독자는 그 황당함에 오히려 매료된다. 그의 상상력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피리 부는 사나이를 소재로 천년의 시간과 전 세계의 무대를 비좁게 만든다.

 

박형서의 이 작품집은 분명히 판타지 문학이다. SF나 유령이 나오는 작품만 판타지는 아니다. 현실에 기반하지만 이성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현실의 비현실적 속성을 다루는 게 오히려 수준 높은 판타지다. 언뜻 황당무계할 수도 있지만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현실에 잠복해 있는 진실을 재발견할 수 있도록 해준다.

 

<너와 마을과 지루하지 않은 꿈>은 화자의 독특한 시점이 흥미롭다. 2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이라고 할까. 화자는 언제나 너와 마을을 배회하며 관찰한다. 결말은 충격적 의외성을 안겨준다. 이색적인 이야기 자체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정류장>에서는 순진한 부정(父情)에 가슴 맺힌다. 아들을 위해 버스정류장이 들어서도록 온갖 노력을 하는 아버지. 염원대로 정류장은 들어서지만 이는 오히려 그들 부자와 마을에 재앙을 가져오고 만다. 수십 년 후 화자가 우연히 수몰된 고향을 찾게 된 것은 결국 마음 한구석에 잠재된 아버지에 대한 소멸되지 않는 기억의 작용이리라. 이제 그는 낡은 정류장을 떠날 수 있게 되었으며, 아버지도 그를 떠나보낼 수 있게 되었다.

 

<나무의 죽음><열한시 방향으로 곧게 뻗은 구 미터가량의 파란 점선>은 산신령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닌다. 전자에서는 도로 개설을 두고 산의 정령과 물의 정령이 서로 다투는 과정이 현실과 교묘하게 결합되어 엉뚱하지만 별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후자는 설화를 과학적으로 재현해 본다는 황당함이 등장인물들의 진지한 학술적 태도에 압도당해 독자마저도 숨을 죽이고 재현 결과를 기다리게 만든다. 산과 물은 본시 하나임에도 인간 앞에 그들은 갈라져 버리고, 자연은 죽어간다. 그네들을 분열시키고 망쳐버린 것은 외견상 정령들 자신이지만 실상은 이를 부추기고 밀어붙인 인간들이다. 이러한 건방진 인간들에게 자연의 가공할 위력을 보여준 것이 금도끼은도끼의 산신령이다. 설화를 자체로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는 그들에게 산신령은 외경의 대상이 아니라 한낱 분석과 실험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아이들>은 무엇보다 시() 자체에 대한 논의가 흥미롭다.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이를 극복하고 본질을 드러내려는 가열찬 치열함이 시인의 숙명임도. 그것은 도구를 달리하지만 모든 예술에 공통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천재성이 아무에게나 주워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술은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랬다면 살리에리는 좌절하지 않았을 것이며, <달과 6펜스>의 비극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원로시인의 자괴감도.

 

<갈라파고스><자정의 픽션>도 이채롭다. 둘 다 동물이 주된 인물이라는 점, 그리고 이름이 동일하게 성범수라는 점. 작가의 지향은 인간이 아닌 동물의 시각에서 사건을 구성하고 전개하는 데 있다. <너와 마을과 지루하지 않은 꿈>도 동물-땅벌-의 시각으로 구성되지만 관찰자에 그칠 뿐 사건을 주도적으로 이끌지는 않는다. 반면 이 두 작품에서는 당당한 주인공 역할을 수행한다. 둘 다 순환구조라는 점도 흥미롭다. 인간의 허울을 벗겨버리면 인간 자체는 매우 연약하고 초라한 존재다. 그럼에도 가난한 연인이 꾸는 꿈은 평화롭고 안온하며 행복하리라.

 

수록작 중 가장 길며 웅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것이 <나는 부티의 천 년을 이렇게 쓸 것이다>인데, 천년을 훌쩍 뛰어넘고 동서양을 넘나드는 장쾌함에 압도된다. 고대 인도의 종교적 요소를 피리 부는 사나이이야기와 교묘하게 연결시키고 불사의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 일주의 대탐험을 겪고 우리나라에 오게 한다. 영원한 생명을 버리고 유한적 존재가 되기로 결심하여 평범한 늙은이가 된 부티=한분태의 엄숙하고 진지한 한마디가 패러디되는 장면을 보자.

 

박형서,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자 스토리 크리에이터이다. 어떤 순간에도 절로 웃음을 자아내는 진지한 골계미는 작가 특유의 미덕이다. 소설마저도 철학과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시기다. 거창한 작품해설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야기 본연의 힘과 재미를 끌어낼 수 있는 박형서 만의 프로젝트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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