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 청소부 예찬 세계문학의 숲 15
찰스 램 지음, 이상옥 옮김 / 시공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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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사에서 수필문학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엘리아 수필집>의 번역본이다. 기존 다른 번역본과 마찬가지로 완역이 아니라 발췌번역을 하고 있지만, 총 52편 중 27편을 수록하고 있어 번역본 중에서는 가장 많은 편수를 수록하고 있다.

 

흔히 수필문학을 분류하기를 에세이와 미셀러니로 나누고, 전자의 대표작을 몽테뉴의 수상록으로 후자를 찰스 램의 수필로 구분한다. 최소한 내가 학창 시절에 배웠던 바로는 그러하다. 이 수필집은 작가가 엘리아라는 필명을 사용하여 제재와 서술 방식 면에서 에세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변잡기적 소재를 자유로운 방식으로 전개하고 있다.

 

찰스 램은 개인적 약점을 많이 지닌 인물이라고 한다. 가족과 자신을 괴롭힌 정신병력은 물론 말더듬이 증세도 있었다고 하며 평생 누나를 부양하며 독신으로 힘겹게 가난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에서는 은은한 따스함이 느껴지는데 이는 가히 천부적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자신이 경제적,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지 않는 만큼 그가 바라보는 시선도 하층민과 평민 계급을 많이 향하고 있다.

 

그의 수필들은 개인에 관한 것과 사회에 관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개인에 관한 것은 작가의 개인사와 일상사를 반영한 것인데, 몽상, 와병, 퇴직, 유년시절의 추억, 학창시절의 추억 등 개인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소재를 슬쩍 한 발짝 떨어뜨려놓고 담담하게 때로는 해학적으로 희화화하면서 기술한다.

 

사회에 관한 이야기들은 ‘굴뚝 청소부 예찬’이나 ‘수도에서 거지들이 쇠퇴하는 데 대한 불평’ 등 빈곤과 관련된 편들도 있으며, ‘돼지구이를 논함’과 ‘식전기도’, ‘현대의 여성존중 풍습’ 등 작가의 눈에 비친 사회 일반의 소재를 두루 다루고 있다. 마찬가지로 읽는 이에게 담백한 즐거움을 안겨주면서도 단순한 글장난이 아니라 사회현상에 대한 신선한 관점을 제기하여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그러면서도 직설화법으로 직접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독자의 자연스러운 환기를 유도하는 솜씨는 역시 문학의 본령을 벗어나지 않는다.

 

엘리아의 수필은 명성에 비해 국내에는 그다지 큰 관심과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우선적으로 19세기 전반부의 대영제국 시기를 다루고 있는 시대적 배경의 차이가 크다. 허구에 기반을 두는 소설 문학과는 달리 수필 문학은 본질적으로 작가 개인 의존적이므로 시대적 배경에 밀접하다. 따라서 문화가 이질적이고 연대가 차이나는 램의 작품은 현대 우리나라 독자에 대한 소구력이 약하다.

 

또한 램은 수필에서 무수한 인용을 남발(?)하고 있다. 자신의 지적 능력의 과시와 아울러 고급독자에 대한 지적 욕구 충족의 목적도 있는 듯하다. 성서와 셰익스피어의 일상적 인용은 물론 라틴어와 시, 소설 등에서 불쑥 들이대는 문장은 그 원전을 익히 아는 이에게는 지적인 기쁨을 제공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우리네들은 주석을 외면하자니 영 미진하고 일일이 헤아리자니 문맥이 단절되는 이중고에 시달린다. 현대 독자에 대한 이러한 미배려는 당연히 관심 축소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엘리아의 어조는 흥미롭다. 그의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으며 쉽게 흥분하지 않는다. 이성적으로 또박또박 말을 이어가면서도 결코 차가운 논리에 매몰되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자신과 이웃을 차별 없이 따뜻하게 감싸 안는다. 그는 타인과 사회의 허물 및 모순을 날카롭게 파헤치지 않고 우회적으로 기술한다. 그래서 허물은 더 이상 허물이 되지 않으며 사람들은 재밌게 글을 읽어나가면서 은연중 모순 개선에 동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램의 글이 많은 수필가들이 그러하듯 신변잡기의 함정에 빠지지 않은 연유는 아마도 엘리아라는 필명을 통해 작가와 글 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두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소설과 달리 수필은 자칫 개인적 속성의 과다 노출로 문학성을 놓치기 쉽다. 램은 이러한 함정을 용케 잘 피해나간다. 아울러 ‘크라이스츠 호스피틀 학교-35년 전 이야기’와 같이 엘리아의 글에 대한 반박 내지 보완이라는 패러디까지 만들어냈다.

 

램의 글을 읽지 않은 이는 그의 수필들이 자칫 지루하고 진부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섣불리 지니지 말지어다. ‘오래된 도자기’에서 가난한 시절의 아껴서 구입한 책과 대중석에서의 연극 관람이 주는 소소한 기쁨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현재에 비할 바가 못 된다는 누이의 주장은 물질적 풍요로 상실하기 쉬운 가난의 미덕을 재발견하고 있다.

 

‘수도에서 거지들이 쇠퇴하는 데 대한 불평’에서 엘리아는 거지들의 적선 행위의 진실성을 캐묻지 말라고 요청한다. 그냥 그들을 연극배우라고 여기라고 제안하다. “거지들이야말로 살찐 시민에 대한 건전한 억제요 저지”(P.160)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여성존중 풍습’은 이중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대의 여성존중은 엄밀히 말해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여성존중이 외모와 사회적 지위에 따라 차별받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 치레”(P.226)에 불과하다고 엘리아치고는 강경한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작가는 여성 자신의 여성에 대한 존중이 매우 중요함을 지적하는데, 이는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돼지구이를 논함’을 읽으면서 가식없는 해학과 유머에 웃음 짓지 않는 이는 자신의 정서가 얼마나 메말랐는지 반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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