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면순 - 조선시대 성풍속 소화집
윤석산 / 문학세계사 / 1999년 3월
평점 :
절판


며칠 전에 중고로 책을 구입할 때 함께 딸려온 책이다. 제대로였다면 일부러 찾아서 읽지 않았을 터인데 인연의 끈이 길다. 표제와 부제가 모두 흥미롭다. 잠을 막는 방패, 즉 내용이 흥미진진하여 심심파적으로 으뜸이라는 말이다. 게다가 부제는 ‘조선시대 성(性)풍속 소화집(笑話集)’이다. 한 마디로 간추리면, 조선시대의 흥미로운 야설 모음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 윤리가 지배하던 조선시대에 선비들이 음담을 즐겼다는 것은 이채롭다. 게다가 이런 유형의 책들을 쓴 이가 당대의 학자들이다. 강희맹과 서거정이 그러하며, 이 책의 작자인 송세림도 연산군과 중종 시절의 문신이다. 작중에는 신숙주의 이름도 등장한다. 이로써 당대 유학자들도 사람살이를 너무 팍팍하게 죄기 보다는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운 분출을 인정한 것을 알 수 있다.

 

내용은 짤막한 우스갯소리 즉, 해학적 골계미가 넘치는 재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다수는 음담(淫談)이다. 옥문, 옥경, 양경, 양도 등 남녀 성기를 지칭하는 용어들이 거리낌 없이 등장한다. 선비와 기생, 주인과 계집종, 과부와 총각하인 등 관계도 다양하다. 심지어는 수간(獸姦)까지도 등장하는데 너무 천연덕스러워 오히려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정도다. 그 외 순수한 골계담도 간혹 들어있다. 작자는 음담을 위주로 하여 시중에 퍼져있는 여러 재미있는 이야기를 수집한 것이다.

 

매 편마다 참으로 흥미진진하여 무심코 읽다가는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책장을 넘기게 된다. 그러면서 이야기들이 별로 생소하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런 장르의 대표 격인 유명한 <고금소총(古今笑叢)>에 이 책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고금소총> 자체가 여러 이야기책들의 모음집이므로 충분히 그럴법한 일이다.

 

많은 이야기 중에서 ‘기생을 사랑하는 까닭’은 여운을 되새기게 한다. 어떤 선비가 아내를 멀리하고 기생만 가까이 하면서 아내는 공경과 분별을 해야 하는 정의가 있으므로 존경할 수는 있지만 희롱하기는 어렵다고 말하자, 아내가 화를 내면서 자신이 언제 분별 대우를 원하였냐고 대들었다는 이야기다. 확실히 사극을 통해 보더라도 조선시대 사대부가에서는 부부가 서로 존칭을 쓰며 공경하였으니 상호 수작을 벌이고 희롱하는 재미를 누리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기실 아내의 입장에서는 남편의 겉치레 공경보다도 허물없고 살가운 애정을 더 그리워함은 자명할 것이다.

 

가장 탁월한 이야기로 ‘주장군전(朱將軍傳)’을 꼽고 싶다. 분량 면에서도 두드러질뿐더러 남성 성기를 의인화하여 가전체 형식으로 기술한 솜씨가 자못 뛰어나다. 게다가 작중 인물과 배경도 모두 성적인 비유를 절묘하게 그려내고 있어 맹앙지(猛仰之)가 보지(寶池)를 개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다는 제재와 주제 간의 유기적 연결이 빈틈없이 전개된다. 맹(猛)이 분투하는 장면을 인용한다.
“맹이 조칙을 받들어 머리를 두드리며 병사를 일으켜 고락을 함께 할 것을 기약하고 혹 타이르고 혹 빨리하고, 혹 나오고 혹 돌고, 혹 전체를 드러내어 굽히고 펴고 엎드리고 일어남에 다시 나오고 깊이 집어넣어 몸을 구부리고 힘을 다함에 반드시 죽음에 이르기를 기약하더라.” (P.62)

 

이 시절만큼이나 가정과 사회 전반에 성(性)이 넘실대는 때도 없을 것이다. 야설과 야사, 야동은 이미 남녀노소 불문하고 세인들에게 익숙한 용어가 된 지 오래다. 성의 상품화로 성에 대한 금기는 물론 신비도 아울러 깨져버렸다. 이런 시대에 자칫 수백 년 전의 성 이야기는 고리타분하고 진부한 것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그런데 막상 읽어본 이야기는 현대의 적나라한 야설과 음담도 따라가지 못할 유쾌함과 밝음을 지니고 있다. 어둡고 으슥한 곳에서 소리를 죽여 가며 주고받는 것이 아닌 환한 대낮에 자연스러운 당당함을 지닌 성(性). 성(性)은 모름지기 자연스러워야 하며, 그것이 인간 본연의 속성임을 옛이야기에서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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