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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단막극선집 - 대역/주석본
송옥 지음 / 동인(이성모) / 2009년 10월
평점 :
수록작품
<제2 목동극> : 작자 미상
<피라머스와 티스비> : 윌리엄 셰익스피어/프레데릭 리틀
<골짜기 그늘 아래> : 존 밀링턴 싱
<바다로 가는 사람들> : 존 밀링턴 싱
예이츠와 동시대 아일랜드의 요절한 극작가인 존 밀링턴 싱의 작품이 수록된 국내 유일(?)의 책이다. 아쉽게도 그의 대표작 <서쪽지방에서 온 난봉꾼[멋쟁이]>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제2 목동극>은 중세 신비극으로 웨이크필드의 수도승이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신앙극답게 예수 탄생의 신비를 소박하게 그려내고 있다. 여기에는 당대 목동들의 고달픈 삶이 해학과 어우러져 특유의 페이소스를 자아낸다. 흠을 잡는다면 예수 탄생 이전임에도 구세주와 기독교 성인 이름이 스스럼없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매우 지루할 것으로 예상하였는데 의외로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다. 이는 종교적 내용의 비중에 비해서 세 목동들의 고달픈 신세 한탄, 양도둑 매기와 그의 아내 질의 속임수 등 세속적 사건이 극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서 연유한다. 종교극을 표방한 한바탕 세속극이라고 하겠다. 예수 탄생의 필연성을 현실의 목동과 농민들이 고초를 겪는데서 찾는다.
<피라머스와 티스비>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한여름 밤의 꿈>의 극중극 장면을 한 편의 단막극으로 번안한 것이다. 솔직히 원작이 어떠한지는 읽어본 지가 오래되어 가물가물하다. 영주 앞에서 하층민들이 연극 공연을 벌이는 것인데, 그네들의 거침없는 말투와 바텀[바틈]의 거리낌 없는 좌충우돌이 인상에 남는다. 가벼운 소극(笑劇)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앞의 작품들에 비하면 존 밀링턴 싱은 극의 성격과 분위기가 확연히 대조적이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외딴 섬에서 거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극을 그리고 있다. 싱이 무대로 삼은 곳은 아일랜드 서부의 아란 군도이다. 거친 대서양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이곳은 아일랜드에서도 가장 오지이며, 환경이 척박하여 힘겹게 생존 투쟁을 벌여야 하는 열악한 땅이다. 역설적으로 가장 문명화가 덜 되어 있기에 켈트 문화의 고유성이 가장 많이 살아남은 곳이다. 싱은 이곳에서 아일랜드 고유문화의 원형을 발견하고 이를 생생하게 극에 반영시키고자 하였다.
두 작품의 주인공은 여인들이다. 아란 군도의 여성들은 가난과 무지의 억압으로 인해 일반적 여성다운 삶을 누리지 못한다. 그네들은 오로지 삶을 유지하기 위해 원치 않은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 게다가 언제든 배를 집어삼키는 무자비한 자연으로 인해 남편과 자식들이 목숨을 잃어도 체념한 채 살아가야 한다. 이 모든 요인들이 지독한 숙명성과 수동성을 부여하여 그네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아란 사람들이 무조건 운명에 굴복하지는 않는다. 입센의 <인형의 집>을 연상시키는 <골짜기 그늘 아래>에서 가정제도의 억압성을 못견뎌하고 벗어나려는 여주인공 노라. 수동성을 탈피하고 능동적 여성상을 선택하려는 여주인공 이름이 입센의 작품과 동일하다는 점을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하기 어렵다. 그녀의 자유로운 영혼은 켈트의 유산으로서 노라가 마이클 대신 떠돌이와 길을 떠나는 것도 이를 나타낸다고 하겠다.
<바다로 가는 사람들>에서 모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섬을 떠나는 배를 타려는 바틀리의 태도도 숙명에 저항하는 인간의 도전을 표상한다. “바다로 가는 건 젊은이의 삶”(P.277)이라는 캐스린의 대사는 곧 이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키워드이다. 죽을 줄 알면서도 바다로 가는 사람들, 죽을 줄 알기에 이를 만류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바다로 표방되는 자연은 위험천만하지만 삶을 위해 동반이 불가피한 존재다. 삶과 죽음이 나란히 이웃한 그곳에서 사람들은 두가지 삶의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운명에 오뚝이처럼 도전할 것인가, 운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할 것인가.
작가 싱이 아일랜드의 오지에서 발견한 것은 날것 그대로의 아일랜드였다. 근대 도시문명에 길들여진 나약함이 아니라 거칠고 투박하지만 그 안에 억압과 운명에 굴복하지 않는 불굴의 영혼을 지닌 아일랜드인.
<골짜기 그늘 아래>에서 노라는 과감히 문을 박차고 길을 떠난다. 그녀의 앞길은 평탄하지 않을 것이다. 제아무리 떠돌이가 장밋빛 미래를 주절거려도. 집을 나서는 순간 노라는 가정이 주는 안전과 보호막을 상실하고 세찬 풍파에 직면해야 한다. 헐벗고 굶주리며 길바닥에서 새우잠을 자야하는 처지에 놓일 수도 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감수한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것처럼 주체를 상실하고 피동적인 삶은 사는 대신 그녀는 힘겹더라도 자아를 지키며 능동적인 주체가 되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바다로 가는 사람들>의 마지막 장면은 바틀리를 보내는 노모 모이라와 여인들의 호곡으로 맺는다. 모이라에게 죽음은 이미 낯선 현상이 아니다. 슬픔을 자연스레 받아들여 이를 초월하려는 달관의 심적 정서가 면면히 흐른다.
“더 무얼 바라겠어요? 영원히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우린 이걸로 만족해야지요.” (P.307)
바틀리의 누이이자 모이라의 두 딸인 캐스린과 노라는 아마도 엄마와는 다른 삶을 살 것이다. 그녀들은 아직 자연에 도전할 뜻을 가슴에 품고 있다. 그들의 미래가 엄마의 것과 같은 상황이 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지만, 최소한 그들은 젊기에 삶을 그대로 방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네들의 남편과 자식은 앞으로도 계속 바다로 가게 될 것이다.
참고로 이 책은 수록 작품의 원문과 번역본을 나란히 실은 영한대역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