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너도밤나무 (보급판) 지만지 고전선집 19
드로스테-휠스호프 지음, 조봉애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세계 각 국의 화폐에는 자국의 최고 상징물 또는 인물을 도안에 수록하고 있다. 국내만 해도 기존의 율곡, 퇴계, 세종대왕 외에 신사임당이 들어가 있다. 다소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이들 모두가 결코 간과될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공히 동일하다.

 

독일의 20 마르크화짜리 지폐의 도안은 한 여성작가를 내세우고 있다. 이름도 우리에겐 생소한 작가인 드로스테-휠스호프. 도대체 독일에서 이 작가는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지 자못 궁금하다. 그녀의 대표작이 바로 이 <유대인의 너도밤나무>라는 노벨레다.

 

‘베스트팔렌 산간지방의 풍속화’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작품은 독일의 숲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숲이 주된 배경이라는 측면에서 아달베르트 슈티프터가 뇌리에 떠오르지만, 그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드로스테-휠스호프에게 독일 산악의 숲-브레데 숲-은 너무 짙고 빽빽하며 악마적이고 불길함이 지배하는 어둠의 영역이다. 숲에 마술적인 신령의 속성을 부여한 점에서는 근자에 읽은 푸케의 <운디네>와 오히려 가깝다.

 

이 노벨레는 사실적이면서도 상징적이다. 작가는 인물과 사건, 배경을 상세하게 기술하기를 일부러 꺼린다. 인물의 성격은 단편적 행동으로 사건 묘사는 핵심만 기술하여 빈 공간은 독자들의 상상과 추론으로 메우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대강 읽어서는 이 짤막한 작품의 표면만 훑고 지나가기 딱 좋다.

 

작가가 본문 앞에 적어놓은 훈계조의 문장 중 끝부분은 작품의 주제와 관련하여 음미할 만하다.

“밝은 공간에서 태어나 자라고,
경건한 손에 의해 양육된 행복한 자 그대는,
저울질하지 말라, 결코 네게 허락되지 않았느니!
돌을 내려 놓아라-그것이 네 머리를 칠 것이다!” (P.14)

 

작품 중간의 메르겔의 살인 혐의와 관련하여 P법원장이 보내온 편지의 “진실이 항상 진실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니다”(P.87)라는 것과, 말미의 지주인 남작의 발언 “죄 없는 자가 죄 있는 자를 대신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은 옳지 않아”(P.106)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작가는 봉건적 문화가 여전히 강력한 지배력을 발휘하는 독일 시골지역에서 정의와 불의의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한다. 불안한 사회적 지위, 의심을 살 만한 충분한 동기. 이를 갖춘 메르겔이 자신의 정당함을 당당히 주장하지 못하고 도주함은 일면 당연하다. 요즘에도 심증과 섣부른 선입견만으로 억울한 이를 매도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지 않는가.

 

메르겔은 살인범이 아닐 개연성이 크다. 이것이 그의 도덕적 무결성을 입증하지는 못한다. 그는 분명히 삼촌의 불법 도벌에 공범이며, 산림관의 살해에도 떳떳하지 못하다. 인격과 행동면에서 그는 세인들의 호감을 사지 못함을 작가는 명백히 밝히고 있다. 즉 그의 인성과 언행은 선입견을 풍기기에 충분하며 주민 및 독자의 동정을 받기에 힘들 것임을.

 

프리드리히 메르겔이 요하네스 니만트로 위장하고서 귀향한 장면은 시사적이다. 메르겔은 그의 정체성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며, 니만트라는 이름이 뜻하듯이 아무도 없는 동시에 아무도 아닌 존재로 전락하였다. 정체성을 상실한 사람의 말로는 예측 가능하다.

 

메르겔이 목매단 장소가 하필 유대인 아론이 살해당한 너도밤나무라는 점도 묘한 여운을 남긴다. 메르겔이 아론의 살인범이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진 상황에서 메르겔도 아닌 니만트가 자살한 이유가 궁금하다. 그가 인생과 운명의 시련에 너무나 지쳐 생존 의욕을 상실하였음은 명백하다. 그는 범행 현장에서 속죄를 구하고자 하였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을 매도한 세인들의 섣부른 의심에 대한 목숨을 건 마지막 항변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 이 작품은 지식을만드는지식(2009)에서 조봉애 번역으로 나온 게 시중 서점에서 유일하다. 내가 읽은 책은 배중환 번역으로 세종출판사에서 1994년에 출간된 것이다. 현재 절판된 상태이며,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아도 아무런 정보도 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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