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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드라 ㅣ 현대영미드라마학회 영한대역 20
W.B.예이츠 지음, 서영윤 옮김 / 동인(이성모)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예이츠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저명한 시인이다. 따라서 예이츠를 시인으로만 알고 있는데, 사실 그는 26편의 희곡을 쓴 극작가이기도 하다. 시는 예이츠의 내면 정서를 드러내는 표현 수단인 반면, 극은 그의 사회 활동의 기반을 이루는 표출 도구였다.
예이츠의 희곡은 시인 동시에 극이다. 극시(劇詩)은 시에 중점을 두는 명칭이고, 시극(詩劇)은 극에 우위를 부여한다. 한마디로 그의 희곡은 운문 희곡이다. 시의 정신으로 씌어진 극작품으로 무대 상연을 목적으로 하였으므로 희곡으로 분류함이 타당할 것이다. 다만 통상적인 산문체의 극과는 달리 대사에 운율이 깃들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된다.
예이츠의 희곡은 연극의 정통에서 다소 비껴있다. 그의 작품은 대개 단막극으로서 장막극의 주류와는 차별된다. 또한 당대의 사실적 표현과는 달리 후기로 갈수록 단순화된 형식의 상징적 표현을 주로 한다. 무대 장치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일본의 노극의 영향이 강하게 미쳤다고 하는데, 예이츠의 기본적 성향도 일조하였다고 본다.
<디어드라>는 전기에 속하며, <매의 샘에서>는 후기에 속한다. 따라서 후자가 보다 상징주의적 요소가 심화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무대, 대사, 구성 등 모든 측면에서. 독자에게는 오히려 전자가 쉽게 다가오지만, 전자에도 그만의 개성이 물씬 배어있다.
두 편 모두 이채로운 점은 주요 등장인물이 모두 켈트 전설에서 유래하고 있음이다. 전자는 디어드라와 코노하 왕의 이야기가, 후자는 영웅 쿠훌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아일랜드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작가의 고심을 엿볼 수 있다. 한편 등장인물에 악사들이 등장하고 이들의 비중이 제법 크다는 점이다. 악사들은 켈트 문화에서 유랑시인과 유사하다고 생각되는데, 이들은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서 극 전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코러스를 연상케 한다.
그러고 보니 옮긴이는 작품해설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예이츠의 극은 현대 사실주의극에서 배제된 연극의 기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이츠의 극이 짧은 것은 그의 극이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 때문에 길어지는 사실주의극과는 달리 시간, 장소, 동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불필요한 원형적 영역에서 움직이는 상징적인 극이기 때문이다.”
<디어드라>는 늙은 왕과 젊고 아름다운 왕비, 그리고 젊고 용감한 청년 간의 삼각관계를 소재로 한다. 켈트 문화는 유사한 소재의 이야기를 여럿 남기고 있다. 이 극으로 남겨진 데르드러 외에 페니안을 몰락으로 이끈 위대한 영웅 핀과 그러니아, 데르맛의 정사가 그러하며, 유명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도 비슷한 패턴이다. 약간 차이가 있지만 아서 왕의 죽음도 귀네비어 왕비의 불륜이 원인이 아니던가.
이는 사회적 윤리질서와 사랑의 감정 간 충돌이자 청춘 남녀 간 자연스런 감정의 발로 대 노인과 처녀 간의 부적절한 결합에 대한 반감 등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합법적인 결혼 관계의 당사자 보다는 청춘 남녀의 죽음을 무릅쓴 연애에 더 큰 지지를 보내며 열광을 아끼지 않는다. 한편 이야기의 결말은 남녀의 사랑의 죽음으로 끝맺어져 당대 도덕률과 타협을 도모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매의 샘에서>는 “운문, 산문, 코러스에 가면과 춤 등을 혼합한 극으로 예이츠의 성숙기 극의 특징을 보인다...극에서 사용된 모든 것은 사실을 재현한다고 하는 사실주의 극의 환상에서 일탈하여 상상 속에서 창조하려는 욕구에 종속되어 있다.” (P.14)
그만큼 <디어드라>와 비교할 때 이 작품의 상징성의 정도는 매우 높은 편이다. 대사 자체도 범상하지 않으며, 악사들이 천을 펴고 접는 행위도 극의 제의적인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의도를 강하게 풍긴다.
여기서도 늙음과 젊음이 노인과 쿠훌린을 통해서 극명하게 대비된다. 오십년의 세월을 헛되이 샘가에서 보낸 노인과 영웅 쿠훌린의 목적은 동일하다. 그들은 인간에게 금기시되는 불사를 추구하려고 한다.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을.
켈트 문화에서 샘은 단순히 물이 솟아나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인간에게 현세의 영역을 빼앗긴 신과 요정들이 깃들어 있는 곳으로 그들의 권능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샘물이 솟아나려는 찰나에 강력한 신성의 발현으로 노인은 잠들고 쿠훌린은 넋을 잃고 이끌려 나가게 되고 만다.
예이츠의 극은 시적인 정서와 상징성에 치우쳐 희곡이 갖고 있는 외향성이 많이 희석되어 있다. 그의 작품은 무대화하기 용이하지 않으며, 관중의 호응을 이끌어내기도 만만치 않다. 순전히 희곡만으로 보더라도 흡인력이 떨어짐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의 극에 대한 이해는 시인 예이츠는 물론 인간 예이츠를 올바로 해석하기 위한 기본 전제라고 생각한다.
“희랍극, 중세극은 물론 일본 노극을 소화해서 시를 통해 제의적 형태를 구현하고자하는 탈환상적 기교와 독특한 비젼을 갖춘”(P.18) 점이 예이츠 극의 의의라고 할 것이다.
참고로 이 책은 원문과 번역문을 나란히 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