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친구 바벨의 도서관 11
페드로 안토니오 데 알라르콘 지음, 정창.이승수 옮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해제 / 바다출판사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기획하고 해제를 붙인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다.

 

알라르콘의 대표작은 기실 같은 스페인 작곡가 마누엘 데 파야가 작곡하여 유명하게 된 <삼각모자>이다. 국내에서는 어찌 된 게 이것이 알라르콘의 작품의 첫 번역에 해당하니 기뻐해야 될지 자못 의아하다. 이 책에 수록된 것은 그의 후기 작품집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포함된 8편 중 2편에 해당한다. <죽음의 친구>는 중편, <키 큰 여자>는 단편의 분량으로 제법 편차가 존재한다.

 

두 편 공히 관통하는 제재는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회피가 불가능한 냉엄한 현실이며, 죽음에 대한 공포와 외경은 인간 내면의 심화와 인류 문명의 발전의 추동력이기도 하다. 모든 종교의 출발은 바로 죽음의 인식에 있지 아니한가? 사람들은 사후 세계를 어둡게 그리며 생자(生者)를 훈계하는 일면, 저승도 생각만큼 나쁜 곳은 아니라는 보다 장밋빛 감언으로 겁먹은 영혼들을 위로한다. 그래서 죽음의 연기 내지 회피라는 유혹에 인간의 태생적 취약성을 보이게 마련인 법이다.

 

<죽음의 친구>에서 힐 힐은 글자 그대로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죽음의 친구가 된다. 죽음의 힘 덕택으로 그는 잃어버렸던 신분을 되찾고 사랑하는 여인 엘레나와도 결합하게 된다. 삶이 행복하게 되는 순간 그는 죽음을 외면하고 시골 별장에 숨는다. 죽음이 자신들을 발견하지 못하길 기대하며. 인간은 원래 이런 존재다. 제아무리 눈부시게 포장하더라도 본능적으로 죽음에 대한 반감을 지닌다. 무릇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본능일 것이다. 죽음의 신성이 그토록 강변하였건만.

 

“나는 누구도 고통스럽게 하지 않아. 인간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고문을 가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숙적인 ‘삶’이야. 그대가 그토록 아끼는 ‘삶’이라고!” (P.35)

 

이 작품의 묘미는 막연히 상종하기 싫은 불쾌한 그 무엇으로 치부되었던 죽음의 어두운 신성(神性)의 권능을 마음껏 보여주는데 있다. 오직 절대자를 제외한 무엇도 그의 권위를 침범할 수 없으면 그는 무소불위의 능력을 발산한다. 힐과 죽음의 신성 간 어설프고 무력한 대결 장면을 보라.

 

“왜? 그걸로 나를 죽이려고? 이번에는 검은 망토 차림의 죽음의 신성이 소리쳤다. ‘삶’이 감히 ‘죽음’한테? 이거 참 묘한 기분이 드는데......그래, 우리 한번 붙어 볼까?” (P.96)

 

역설적으로 이 작품의 가장 핵심적 키워드는 죽음의 신성의 말로 나타난다. 그리고 작가가 죽음의 미학을 통해 역으로 들려주는 삶의 소중한 가치리라.

 

“사랑을 향한 사랑이라......사랑은 생명이고, 생명은 사랑이지.” (P.116)
“아! 물론 그렇지......삶이란 곧 사랑이고 사랑이 곧 삶이니까......” (P.118)

 

<키 큰 여자>는 이런 면에서 훨씬 단순하다. 죽음의 전조를 알리는 키가 큰 여자의 출현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의 발현. 그것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텔레스포로의 말처럼 태어나면서부터 언젠가는 그런 여자를 만날 거라고 예감했기에 느끼는 두려움이며, 노파의 외침으로 그 실체, 즉 악마임이 확인된다.

 

그의 다음과 같은 일련의 질문은 곧 우리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의 절실한 의문이라고 하겠다.

 

“그 노파는 인간일까? 왜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그 노파를 만나리라고 예감했을까? 노파는 왜 나를 보자마자 내가 누군지 알아보았을까? 그 노파는 왜 나에게 큰 불행이 닥칠 ㄸ만 나타났을까? 악마라서? 죽음이라서? 삶이라서? 적그리스도라서? 그 노파는, 그 키 큰 여자는 누구지? 도대체 뭐지......?”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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