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울크리크 다리에서 생긴 일 ㅣ 기담문학 고딕총서 9
앰브로스 비어스 지음, 정진영 옮김 / 생각의나무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이탈로 칼비노 편의 <세계의 환상소설>에서 ‘치카모가’가 소개된 앰브로스 비어스의 단편집이다. ‘기담문학 고딕총서’의 일환으로 출판된 것이니 역시 구분하자면 환상소설 범주에 해당된다. 비어스는 이외에도 <악마의 사전> 등 주로 냉소적으로 사물과 현상을 꼬집는 글들로 당대에 유명하였다고 한다.
표제작 ‘아울크리크 다리에서 생긴 일’을 포함하여 수록된 17편의 소설들은 짧은 분량에서도 환상소설이 그 생경함과 기이함을 잃지 않고 잘 보여줄 수 있는지 여실히 입증한다. 총칭하여 환상소설이지만 순전한 판타지의 영역에서부터 공포문학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비어스는 공포와 살인에 유독 관심이 많은 듯하다. 수록작 모두 살인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시대적 배경으로는 미국 남북전쟁 전후와 서부 개척기를 주로 다룬다. 괴기 공포물은 모두 인간의 두려움을 자양분으로 작품이 전개된다. 대규모 인명 살상은 소위 말하는 유령과 악령이 판치기 좋은 사건이다. 납량물에서 공동묘지와 폐가가 자주 다루어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한 인적이 드문 미지의 외진 곳, 맹수와 정체모를 위협적 존재가 돌아다니는 깊은 숲 등에서 인간은 심리적으로 위축되기 마련이다.
분량의 제약 상 비어스는 사건과 인물, 배경에 대한 세세한 묘사를 건너뛰고 특징적인 요소만 강조한다. 그림으로 치면 소묘나 캐리커처 정도라고 할 정도인데,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독자의 상상력이 활개를 칠 수 있는 충분한 여백의 효과를 준다. 그리고 끝에는 강렬한 반전! 읽는이는 결말을 통해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처음부터 되새김을 해야 한다. 그런 후에 비로소 짤막한 감탄과 동의의 표현(예, 아하!)을 내뱉을 수 있는 것이다.
여름밤 사위가 조용한 가운데 옹기종기 모여 앉아 번갈아 가며 소위 귀신 이야기를 주고받은 경험을 대부분 갖고 있으리라. 개중에는 즉각적 반응을 이끌어내는 이야기도 있지만, 잠시 음미해야 공포가 밀려오는 부류도 있다. 비어스의 이 작품들을 읽다보면 문득 제재와 배경은 이와 다르지만 그다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데, 시공을 초월하여 인간 심리의 본질적 요소는 유사한데 연유할 것이다.
수록작을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기이한 초자연적 체험을 다룬 유형(핼핀 프레이저의 죽음, 카르코사의 주민, 요물, 심리적인 난파), 인간 심리에 미치는 공포의 영향을 다룬 것들(시체를 지키는 사람, 인간과 뱀, 표범의 눈), 죽은 영혼이 등장하는 작품들(매커저 협곡의 비밀, 덩굴, 이방인, 오른발 가운뎃발가락), 기이한 죽음 자체를 다룬 소설들(아울크리크 다리에서 생긴 일, 개기름, 막힌 창, 막슨의 걸작, 내가 좋아하는 살인, 말 탄 자 허공에 있도다)이다.
이들 작품에서 심오한 철학적 깊이를 구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순수한 스토리가 주는 재미와 환상적 요소의 효과(두려움, 기이함, 생경함, 의아함 등)를 즐기면 충분할 것이다. 작가 자체도 이를 의도했으리라 본다.
공포와 살인이 주가 되면 효과 극대화를 위해 잔혹함이 배가되기 마련이다. 잔혹함은 흔히 피와 살이 튀기는 수단을 취한다. 따라서 과거는 물론 현재도 환상소설은 통상 B급 장르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과거 문학의 대가들, 모파상, 고골, 도스토예프스키, 발자크, 호손, 포 등이 환상문학의 대가였다는 사실과, 소설의 제재가 시대적, 장소적 배경의 구체성이라는 제약 조건을 뛰어넘어 작가의 순전한 창작을 발휘할 수 있는 점, 그리고 인간 내면의 은밀한 비이성적 영역의 존재라는 측면을 고려하며 여전히 환상문학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