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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평점 :
“언제나 처음만 힘들었다. 처음만 견디면 그다음은 참을 만하고, 견딜 만해지다가, 종국에는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P.58)
작중 화자인 윤영의 상념이다. 또한 김이설의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갖게 되는 나의 상념이기도 하다. 처음 이 작품을 읽는 이라면 김이설의 화법과 표현 수위에 강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선정적 효과만 노린 것 외에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지금의 세태에 대한 처절한 고발임도 알게 되어 높은 평가를 보내리라.
이 소설의 가족 관계 역시 범상하지 않다. 애당초 가족 관계란 것이 존재한다면 말이다. 해체되는 가족 관계에서 과감히 해체하지도 못하고 해체를 막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입장에서 온몸으로 세찬 풍파를 감내해야 하는 존재, 그것이 김이설의 작중 화자이자 주인공의 몫이다.
“참을 만큼 참고도 더 참아야 하는 건 가족이었다. 남은 반찬만 갖다 버릴 것이 아니라, 필요 없는 식구도 갖다 버렸으면 싶었다.” (P.46)
작가는 전작과의 차별성을 성(性)에 부여한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여성들이 경제적 궁핍에서 손쉽게 택할 수 있는 수단은 자신의 몸을 활용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런 방면에 매우 관대한 편이며, 암암리에 만연해 있다. 성적 경계선을 넘나드는 작중 화자의 일탈을 묘사하며 작가는 사회와 개인의 모럴과 생존의 모럴을 독자에게 제시한다. 그녀의 선택은 생존을 위해 절박한 것이며, 생존은 반드시 도덕을 요구하지 않는다. 더구나 성적 행위는 반드시 제공받는 타자를 요구하며, 이때 타자는 지위와 돈에 있어서 우위를 점하는 갑에 해당한다.
김이설 소설의 주인공은 환경과 운명의 폭압에 의연히 맞설 만큼 꿋꿋하지 못하다. 좌절과 분노와 체념을 동반하는 그네들의 모습은 지극히 연약하기에 차라리 인간적이다. 그들에게 세상은 밝은 장밋빛이 아니다. 가슴속에 품은 작지만 소박한 믿음이 끝끝내 그들로 하여금 땅에 쓰러지지 않고 버티어 내게끔 하고 있다. 그것은 절망이 주는 희망의 역설이라고 하겠다.
“그래도 나는 남편과 함께라면 지금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현재보다 더 나쁜 경우는 없었다.” (P.47)
“모든 일은 한꺼번에 터지곤 한다. 어떤 일이 더 생겨야 최악이 되는 걸까...최악을 생각해보니 지금의 상황이 그리 나쁜 것 같지 않았다.” (P.154~155)
<나쁜 피>의 화자와 마찬가지로 윤영도 주저앉지 않는다. 자신이 손가락질하고 마뜩찮아 하던 가족들의 전철을 밟지는 않겠다는 결의이다. 동시에 자신의 삶을 결코 외적 환경에 종속시키지 않겠다는 주체성의 표출이기도 하다. 그것은 눈물조차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처절하다.
“엄마와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좀 달라지고 싶었다. 이제와는 다르게 살고 싶었다.” (P.171)
“집까지의 거리가 내 일생의 모든 밤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멈췄다 움직이기를 몇 번을 더 해야 끝이 날까. 끝이, 있기는 할까. 나는 남편의 허벅지를 세게 붙잡아 내 등에 바짝 붙였다.” (P.188)
“왕백숙집으로 출근하던 첫날 아침의 풍경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누구보다 참는 건 잘했다. 누구보다도 질길 수 있었다. 다시 시작이었다.” (P.193)
자극은 곧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더 큰 자극이 아니면 유사 수준의 자극은 무심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나 더 강하고 더 짙은 자극을 갈구하기 마련이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과 <나쁜 피>를 연달아 읽은 나도 김이설의 자극과 충격 요법에 쉽사리 익숙해져 버렸다.
의도 여부를 불문하고 김이설의 작품은 자극과 욕망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의 작품에 대한 일정 부분 대중적 관심은 기실 그것에 대한 관음증적 기대감이라고 하겠다. 꿈꾸지만 행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은밀한 훔쳐보기. 이는 곧 한계에 봉착한다. 자극과 욕망 충족은 주기가 매우 짧다. 현명한 작가라면 이의 함정을 건너뛰어야 한다. 작가는 전작의 한계를 성(性) 요소의 도입으로 이번에 회피하는데 성공하였다. 다음의 행보는 작가 김이설에게 매우 중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