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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배의 탐색
알베르 베갱, 이브 본푸아 엮음, 장영숙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6월
평점 :
절판
13세기에 중세 불어로 씌어진 작품이다. 이 작품에 대한 평가를 역자 후기를 인용한다.
“이 <성배의 탐색>은 1220년경에 쓰인 시토 수도회의 작품인데, 작가는 미상으로 남아 있으며, 성배에 관한 소설들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그리고 가장 훌륭하게 씌어진 작품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P.361)
일단 원탁의 기사의 극적인 모험담을 기대하는 독자라면 재빨리 책장을 덮기 바란다. 이 작품은 원탁의 기사가 등장하는 기독교적 문학 장르로 분류될 수 있다.
크레티앵 드 트루아에 의해 시발된 그라알 이야기는 당대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는데, 로베르 드 보롱에 이르러 종교적 방향성이 설정되었으며, 이 작품은 종교적 측면에서 성배 이야기의 한 정점이라고 하겠다.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 설화의 직접적 영향 하에 기독교적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그만큼 이 작품에서 종교적 요소는 대단히 중핵적 영역이다. 기존 아서 왕 설화의 핵심이 기사들의 모험담이라면, 이 작품의 핵심은 종교와 신앙 그 자체이다.
원탁의 기사 소재를 차용하지만, 작품 내에서 비중과 의의는 사뭇 다르다. 주요 인물은 랜슬롯과 가웨인, 보호트, 퍼시벌, 그리고 갤러해드이다. 이 중 갤러해드가 단연 두드러지는 주인공으로 오로지 그만이 완전무결한 기사로서 성배의 신비를 누리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 퍼시벌과 보호트도 갤러해드보다는 못하지만 그의 동료로서 같이 성배를 찾는 명예가 주어졌다.
반면 랜슬롯과 가웨인은 그렇지 못하다. 호수의 기사 랜슬롯은 전에는 숭고한 기사였지만 왕비와의 불륜적 사랑으로 도덕성에 치명적 흠결을 입었고 따라서 성배를 보지만 다가갈 수 없는 한계를 겪는다. 가장 고아한 가웨인 경에 대한 대접도 자못 실망스럽다. 랜슬롯처럼 뚜렷한 도덕적 흠결이 없는 그이지만, 수년간 고해성사를 외면하였다는 죄목으로 성배 탐색의 영광에서 탈락된다.
작품에서 갤러해드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그는 랜슬롯의 아들이지만, 아버지와는 달리 고귀함과 완전함 그 자체로서 타락과는 거리가 멀다. 성배의 탐색과 동시에 여러 은자들과 목소리를 통해 성배를 찾는 이는 갤러해드임이 반복적으로 예언되며, 때로는 갤러해드의 종교적 의미를 예수의 탄생과 비견하기도 할 정도다.
각 인물들이 탐색 모험과정에서 겪는 여러 모험과 이상한 경험 또는 꿈은 하나하나가 깊은 종교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은자와 사제의 해석을 통해 각 기사의 신실하지 못한 신앙이 비판되며, 이는 작품을 읽는 독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신앙의 길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부드러운 요구에서 강력한 경고까지 포함하고 있다.
종교의 시각에서 기사 개인의 용맹과 능력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자아를 버리고 신에게 의탁하는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 그에 따라 충과 불충이 판명되는 것이다. 이런 단순한 판별 기준은 인물의 성격과 행동을 매우 전형화시키고 평면적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작품의 인물과 전개에 생동감이 부족함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갤러해드 보다는 죄와 구원의 경계를 넘나드는 랜슬롯에 보다 인간미를 느끼게 되는지도 모른다. 외관상 풋내기 기사에 불과한 갤러해드에 대한 작품의 끝없는 찬미와 예찬은 오히려 반감을 자아낼 정도라면 과민할 반응일까?
또한 성명 미상인 작가는 원탁의 기사와 아서 왕의 당대에 비판적인 듯하다. 해몽의 입을 빌려 원탁의 기사들이 사치와 오만으로 심하게 죄에 물들어 있음을 비판하며(P.220), 왕국 사람들이 성배를 합당하게 사용하고 명예롭게 하지 않았다며(P.348) 성배는 아서 왕국에서 사라진다.
이 작품은 무수한 기사들이 등장하지만 기사도 문학이 아니며, 세속적 작품이 아닌 종교적 문학이다. 그것은 알베르 베갱의 서문에서도 나와 있듯이, 이 작품을 쓴 이가 시토 수도회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 혁신을 위해 당대인들에게 친숙한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 설화를 차용하고 변용하는 방법의 결과물이 바로 이 작품이므로.
신자인 경우 그 감흥은 비신앙인과는 매우 다를 것으로 예상된다. 작품의 구성과 소재, 인물 등 모든 요소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어 성서와 기독교 역사에 지식이 있다면 작품을 읽는 재미는 한층 더할 것이다.
작품의 구성은 모든 인물들의 모험이 성배의 탐색에 시종하고 있어 짜임새 있는 집중력을 보이고 있다. 각 인물들의 행위와 꿈 하나하나는 종교적 의미와 알레고리를 갖고 있어 무심히 지나치기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예컨대 <천로역정> 같은 동종의 작품이 일반 독자들마저 감동을 주는 것과는 비교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