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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윈 경과 녹색기사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92
작자 미상 지음, 이동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평점 :
이 작품은 14세기 후반부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작자미상의 운문체의 중세 로망스 문학이다. 작품 해설은 이렇게 소개한다.
“중세 로망스인 <가윈 경과 녹색기사>는 작품에 담긴 상징성, 주제와 소재의 절묘한 조화 및 두운이라는 독특한 운율의 효과 등으로 인해 로망스 문학의 백미로 간주된다.” (P.153)
사실 이러한 평가는 실제 작품을 읽어보지 않으면 무슨 의미인지 다가오지 않는다. 특히나 운문의 번역에서는 독특한 운율미를 표현할 수 없으므로 절반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불리함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우선 이 작품은 단순한 로망스라고 일컫기에는 아까운 측면이 있다. 원탁의 기사가 주인공이고 기사도의 구현이 중요하게 대두되지만, 아름다운 귀부인과의 연애나 사랑은 관심영역에서 제외되어 있다.
이 작품은 진정한 기사도 정신의 구현을 추구한다. 또한 구태의연한 기사도가 아닌 당대 관점에서 참다운 인간성의 추구이기도 하다. 완벽한 기사와 완벽한 기독교인의 가치는 상호배타적이 아니다.
녹색기사가 제안한 목 베기 게임은 죽음을 감수하는, 즉 삶의 본능을 초월할 것을 요구하는 터무니없고 자못 비인간적인 게임이다. 인간이라면 응당 이런 유형의 게임에 자신의 목숨을 도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윈 경이 아서 왕을 대신하여 이 게임에 응하는 것은 오로지 충성과 명예를 지키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에서이다.
녹색기사가 떨어진 목을 주워들고 떠나는 장면에서 그가 인간적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제 일 년 후 가윈 경은 그를 찾아가서 자신의 목을 내밀어야 한다. 더 이상의 게임을 외면할 수 있지만 이는 원탁의 기사의 명예에 대한 손상인 동시에, 신의라는 덕목에 포기하는 행동으로서 신의의 대명사인 가윈 경으로서는 취할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그 일 년간의 삶은 불치병에 걸린 시한부의 삶과 동일하였을 것이다.
가윈 경이 주체가 되는 1차 목 베기 게임과 녹색기사가 주체가 되는 2차 목 베기 게임 사이에 낯선 성의 방문이 자리 잡는다. 여기서 가윈 경과 훌륭한 성주는 가윈 경이 머무는 사흘 동안 획득물 교환 게임을 약속하는데, 각자가 하루에 획득한 무엇이든지 일체를 상대방에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 역시 신의를 바탕으로 한다. 그 사흘 동안 가윈 경은 성주 부인으로부터 세 번의 유혹을 겪으며, 성주는 세 번의 사냥에 성공한다. 유혹과 사냥은 성의 안과 밖에서 병행 구조를 이룬다. 성주의 사냥물은 사슴, 멧돼지, 여우인데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각각이 깊은 함의를 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차 목 베기 게임에서 가윈 경은 목에 가벼운 상처만 입고 목숨을 건지고, 녹색기사는 자신이 성주임을 밝힌다. 그리고 가윈 경의 신의 배반, 즉 성주 부인의 녹색 띠를 받은 것을 숨긴 행동을 엄중히 비판한다.
비록 생을 향한 맹목적 본능(녹색 띠는 착용자의 목숨을 지켜준다!)이었지만 가윈 경은 신의를 저버린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래서 녹색 띠를 영원히 몸에 지님으로써 신의 배반에 대한 경계로 삼겠다고 선서한다. 가윈 경은 비록 인간적 약점을 보였지만, 그것은 가윈 경이 녹색기사와 같은 초월적 존재가 아닌 한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가윈 경은 이마저도 만족하지 않고 더더욱 완벽한 인간성을 구현하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한다.
수많은 원탁의 기사 중에서 가윈 경이 주인공으로 선택된 사유 또한 명백하다. 가윈 경은 아서 왕의 조카로서 완벽한 기사도의 전형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특히 신의가 매우 깊은 것으로 평판이 자자했다.
“자신의 말에 가장 진실된 자이자/예법에 있어서도 가장 공손한 자였다.” (P.45)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그라알 이야기>에서도 페르스발과 함께 양대 주인공으로 고뱅 경, 즉 가윈 경이 등장하는데, 그만큼 가윈 경이 원탁의 기사를 대표할 만한 미덕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 작품은 그 의미와 구성 등을 제외하고도 자체로서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녹색기사와 가윈 경의 기사 복장과 무구 착용 장면에 대한 세세한 묘사는 새삼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중세 기사의 이미지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할 수 있게끔 해준다. 한편 성주의 사냥 장면에 대한 역동적 필치는 당대의 영주 및 기사들에게 있어 사냥은 단순 오락적 요소를 능가하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성주 부인의 가윈 경에 대한 유혹에서는 기사들의 여성에 대한 예법의 실제적 적용 사례를 알 수 있으니, 여인의 감정을 상하지 않도록 우회적 언어표현과, 작별 시 키스가 고상한 예법이었음을, 게다가 사랑의 기교에도 능통해야 했음을 알게 된다.
마지막으로 작품해설을 통해 이 작품의 가치를 다시금 명확히 해본다.
“얽힘구도를 둘러싼 목 베기 게임과 유혹 그리고 획득물 교환게임의 세 요소는 <가윈 경과 녹색기사>의 핵심 구성 요소로서 동시에 작품에서 추구되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등’이라는 철학적 주제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P.168)
“자신의 한계와 허물을 인정하고, 양심의 가책의 상징인 녹색 띠를 통하여 자신의 내면세계를 끊임없이 성찰하는 가윈 경의 자세는 진정한 기사도의 전형으로 간주된다.” (P.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