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요정들의 사랑 - 지만지고전천줄 0073
마리 드 프랑스 외 지음, 이형식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켈트 신화와 전설의 흔적은 중세 유럽 문학에 큰 영향을 남겼다. 아서왕과 성배에 관한 이야기 군이 하나이며, 트리스탄류의 사랑 이야기들이 그러하다. 한편 기독교의 세례로 고대의 신들은 지위가 요정으로 위축되었다. 요정은 더 이상 인간들을 압도하지 못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의 의지에 따라 신과 인간 사이에 사랑이 이루어졌다면, 중세 유럽에서 인간과 요정 사이에 이루어진 사랑 이야기는 여전히 요정의 우위에 있지만 그 격차는 크지 않으며, 사랑에 있어서는 대등하기조차 하다.
이 편역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그러한 요정들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랑발>, <갱가모르>, <요넥>, <기쥬메르>, <비스끌라브레>는 12세기 여류작가 마리 드 프랑스의 글이며, <멜뤼진느>는 14세기 쟝 다라스, <데지레>와 <그랠랑>은 작자미상이다. 또한 <비비안느>는 여러 단편들을 역자가 재구성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야기들에 공통되는 특징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먼저 멋진 기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 기사는 깊은 숲 속의 샘터에서 아름다운 여인과 조우한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을 약속하고 연인이 된다. <랑발>과 <갱가모르>, <데지레>와 <그랠랑>, <멜뤼진느>가 모두 그러하다. <비비안느>도 메를랭과 비비안느의 사랑과 배신이 샘터에서 전개된다는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샘은 켈트 문화에서 요정이 깃들어 있는 장소다. 지상 세계를 인간에게 양보한 고대 신족들이 요정으로 화하여 샘과 구릉 등을 자신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간다. 따라서 샘터에 만난 여인들이 마법을 부릴 줄 아는 것은 당연하며, 인간 세상의 누구보다도 미모에 있어 우월할 수 있는 것이다. 요정은 자신의 존재가 인간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린다. 그래서 연인들에게 자신들의 존재와 사랑에 대해 함구하도록 요구하며, 이를 어겼을 경우 격분을 감추지 않는다.
이야기에는 여러 유형의 사랑이 등장한다. 용맹하고 품위 있는 기사는 뭇 여인의 관심을 끄는데, 왕의 부인 또한 예외가 아니다. 랑발과 갱가모르는 왕비의 구애를 거부하다 참소를 받는 곤경에 처한다. 반면 마음이 맞는 인연인 경우에는 서로의 뜻을 확인한 후 곧바로 다정한 연인이 되어 스스럼없이 애정을 표현한다. 사랑 표현의 솔직성과 적극성 면에서 현대인들을 능가할 정도다. 사랑에 무심하면 “자연을 거스르는 죄악”(P.187, <기쥬메르>에서)으로 비난을 받을 정도이므로.
한편 수록된 이야기들의 지리적 배경을 보면 주로 브르타뉴 지역이다. 물론 프랑스 작가들의 글이니만치 당연하겠지만, 그 중에서도 브르타뉴인 것은 브리튼, 즉 켈트인들의 근거지였던데 기인한다. 그 외에도 브리튼과 스코틀랜드 등이 등장하므로 장소만 보아도 이 작품들이 켈트 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추론하게 된다.
게다가 아서왕이 등장한다던가(<랑발>, <비비안느>) 그의 조카인 호엘의 이름이 언급되기도 하여(<기쥬메르>) 아서왕의 유산의 잔영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곳곳에 기독교적 세례 흔적이 엿보이는데, 요정들이 자신들도 하느님의 세계에 속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래야 이단과 야만의 지탄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 보면 대수롭지 않은 중세의 옛날이야기에 불과할 수도 있으나, 이 단편들을 통해서 켈트 문화를 조금이나마 접할 수 있으며, 중세인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오늘날의 것과 비교해보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스토리 자체가 흥미로워서 읽는 이의 상상력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일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