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스탄과 이즈 (보급판) 지만지 고전선집 64
죠제프 베디에 지음, 이형식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트리스탄과 이즈, 혹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관한 설화는 아서왕 전설의 외전(外傳)에 해당한다. 어떤 연유가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12세기~13세기 동안 집중적으로 트리스탄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가 작가들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마리 드 프랑스, 아일하르트, 토마스, 베룰, 고트프리트 등. 이를 수합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죠제프 베디에가 1900년에 발표한 것이 이 작품이며, 따라서 이것은 선대의 트리스탄 설화에 대한 요약본인 동시에 운문 이야기의 산문화 노력의 결정이라고 할 것이다.

일찍이 바그너의 유명한 악극의 제재로도 선택되었을 만큼 서구에서 널리 알려졌던 트리스탄의 설화는 숙명적인 사랑의 비극의 최고의 구현이라고 하겠다. 콘월과 브르타뉴를 배경으로 한 고대 켈트족 문화의 유산인 이 설화가 기독교 유럽세계에서 스러지지 않고 생명을 이어왔던 연유 또한 종교와 문화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사랑의 힘이자 인간 내면에 절절하게 호소하는 바가 컸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사랑 이외의 모든 것을 잊고 포기하게 만드는 지고의 것이며, 사랑 외에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지순의 존재이다. 사랑 속에서 함께 죽음을 맞을 수 있다면 더 큰 기쁨이 없을 정도의 본질적인 사랑!

트리스탄과 이즈의 사랑의 출발은 운명의 장난이자 동시에 숙명이다. 누군들 운명의 힘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몸부림치면 칠수록 빠져드는 수렁과도 같이 그들의 사랑은 그들 자신의 운명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을 잉태한 비극이기도 하였다.

“나의 벗 이즈여, 그리고 트리스탄 공이시여, 그대들은 그대들의 죽음을 마시었소!” (P.59)

“아! 우리가 마신 것은 우리의 죽음이었소!” (P.219)

순전한 감정 외에 사랑의 미약의 힘을 입었으니 연인의 사랑의 정도는 이루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절절하기 그지없다.

“사랑이란 스스로를 감출 수 없는 법이다...그러나 언제 어디에서건, 서로에게로 향한 갈망이 두 사람을 끊임없이 뒤흔들고 괴롭히며, 고이기 시작하는 포도주가 양조 통 언저리로 질질 넘쳐흐르듯, 두 사람의 모든 감각기관에 넘쳐흐르는 것을 느끼지 못할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P.72)

“그러나 사랑을 오랫동안 감출 수 있는 자 누구겠는가? 애석하도다! 사랑은 결코 감추어질 수 없는 법이다!” (P.87)

“하지만 우리에게 죽음 따위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대 나를 부르시며, 나를 갈망하시니, 주저치 않고 가리다!” (P.152)

두 사람은 마크 왕을 피해서 모르와 숲으로 달아난다. 이는 핀의 전설 중 데르맛과 그러니아의 추격 부분을 차용한 게 명백할 정도로 상당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숲 속에서 거칠고 가진 것 없는 생활이지만 소박한 행복을 느낀다.

사랑은 항상 굴곡이 있기 마련이다. 사랑에 빠진 연인은 상대방이 한시도 자신에게서 눈을 떼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은 질투와 의심의 그림자를 지니게 마련이다. 이것은 사랑을 한층 강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자칫 증오로 변질되는 촉매제의 역할도 한다.

트리스탄의 영원한 여인은 이즈, 금발의 이즈였다. 하지만 브르타뉴에서 방랑하다가 그는 또 하나의 이즈, 흰 손의 이즈와 덜컥 혼인을 치른다. 흰 손의 이즈는 무슨 잘못이 있던가. 그녀는 아버지와 오라비를 위하여 공을 세운 트리스탄에게 순수한 연모의 감정을 가졌을 뿐이다.

트리스탄의 경거망동은 금발의 이즈에 대한 배신감 탓일까 아니면 오랜 외로움의 순간적 발현 작용일까?

“아! 어찌하여 그토록 선뜻 그 대답을 하였단 말인가? 그 한 마디가 결국 그의 죽음을 초래하지 않았던가?” (P.174)

“그러나 또한, 순박하고 아름다운 흰 손의 이즈, 자기의 아내가 된 그 여인 역시 측은하였다. 두 여인이 모두 불운하여 자기를 사랑하게 된 것 같았다. 자기가 두 여인을 모두 배신한 것 같았다.” (P.175)

남편이 자신이 아닌 다른 여인만을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여인이 감정을 절제하고 이성을 유지하길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흰 손의 이즈를 미워할 수 없다. 오히려 그녀에게 공감하고 동정할 뿐이다. 작가의 비난과는 달리.

트리스탄을 만나기 위하여 오는 선상에서 마주친 폭풍우에서 절규하는 이즈의 외침은 곧 비극적 사랑의 절대적 구현이 아니겠는가.

“제가 없이는 임께서 죽으실 수 없고, 임 없이는 제가 죽을 수 없으니, 그것이 우리의 사랑이에요!” (P.225)

둘의 사랑은 결국 죽어서야 무덤에 피어난 찔레나무로 맺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

1천년 전에 씌어진 이야기, 그 연원은 수세기를 더 앞서가는데 트리스탄과 이즈의 사랑은 시공의 차이를 느낄 수 없다. 현대인들보다도 더 구구절절하며 가슴 아프다. 두 사람이 조금만 더 자제했으면 더 요령껏 행동했으면 하는 일말의 아쉬움도 이미 문명의 때에 찌든 초라한 현대인의 부질없는 탄식이 아니겠는가! 사랑은 조건이 없으며 오직 사랑 그 자체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 이 작품의 국내 번역본은 두 사람의 판본을 시중에서 구할 수 있다. 진작부터 출판사를 달리하여 계속적으로 내놓는 것을 보아 두 사람의 이 작품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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