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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 산문의 향기 001
박이문 지음 / 미다스북스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묵직한 산문의 향기에 취하다]
학창시절에 수필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배웠다. 미셀러니는 가벼운 유형이며, 에세이는 진지한 유형으로 에세이의 대표적인 작품이 몽테뉴의 수상록이라고 한다. 이렇게 볼때 박이문의 산문은 분명히 에세이에 속한다. 여기서 독자는 경묘한 붓끝과 날렵한 문체를 기대하지 말 것이다.
박이문의 글은 낯설지 않다. 이미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그의 ‘길’이라는 작품을 접하지 않았던가. 이제 ‘길’을 포함한 그의 묵직한 산문을 접하게 되니 감회가 남다르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가벼운 글쓰기에 경종을 울리려는 듯, 단어 하나하나에 문장 한 줄 마다에 성찰의 무게가 반영되어 있다.
그의 글은 철학적이다. 철학이라고 해서 괜히 골치아픈 난해한 용어와 논리를 들이미는 것이 아니다. 길, 밤, 바다, 담, 삶, 시골, 집, 얼굴, 여행, 기차, 편지, 명함 등 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소재에서 미처 우리가 깨닫지 못한 깊은 의미를 캐어 그 담백한 향기를 더불어 즐기게끔 한다. 철학은 먼데 있지 않다.
사람마다 말투가 다르듯이 그의 글투도 남과는 다르다. 우선, 차분하다. 그는 결코 흥분에 휩싸여 일필휘지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그의 차분함에 독자도 무의식중에 마음을 가라앉히게 된다. 그리고 담백하다. 그는 세상의 고뇌와 격랑을 초월한 듯싶다. 어찌보면 재미없다는 말을 듣기 딱 좋다. 하지만 깨달은 자만의 담백함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리라.
그의 산문은 아침이나 한낮에 읽어서는 제 맛이 나지 않는다. 만물이 어둠의 그림자에 뒤덮이고 숨을 죽이는 한밤에 비로소 나지막한 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그 울림은 천천히 주위를 휘감고 잔잔히 퍼져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