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이순신 6 - 삼도 수군 통제사
김탁환 지음 / 황금가지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 전에 순천의 낙안민속마을을 구경한 적이 있다. 성벽 위에서 조망하는 옛 시절의 초가집들. 작년 가을에 지붕을 새로 한 듯 황금빛 볏짚이 석양에 비쳐 자태가 아름답기 그지 없다. 저녁 식사 준비를 하기 위해 때는 불의 연기가 굴뚝을 통해서 모락모락 하얗게 피어 오르는 모습은 목가적인 전원 풍경 그 자체이다. 저절로 시 한 수가 배어나올 마음이 절로 흐뭇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스위스는 중부 유럽에 있는 나라다. 국토의 크기도 작은데다 대부분이 알프스 산맥에 놓여 있어서 강대국들의 영토 야욕을 자극하지 않는다. 덕분에 18세기 초에 영세중립국의 지위를 획득하고 평화를 유지하며 직접참여에 의한 민주정치를 구가하고 있다.

이러한 스위스가 인류문화에 끼친 영향이 별볼 일 없다고 혹자는 주장한다. 차라리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이 오히려 인류문화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 언뜻 생각을 해 본다면,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비행기의 상용화가 이루어졌고, 원자력발전의 기초가 쌓였으며, 수많은 식민지가 독립을 쟁취하였다. 그리고 UN과 같은 세계정부를 구성하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그 외 전쟁을 소재로 한 방대한 예술적 성취를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그에 반해서 스위스가 독립한 지 사백 년 가까이 되었지만 크게 내세울 만한 것이 무엇일까? 아름다운 자연환경은 말 그대로 자연환경이므로 배제시킨다면, 산업의 발달, 기술의 개발, 문화예술의 눈부신 발전 등 두드러지는 것이 없다.

결론적으로 인류문화의 발전을 위해서는 스위스 같은 평화롭고 안정된 민주정부를 유지하는 것보다 전쟁을 지속적으로 유발하는 것이 좋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러한 주장에 동의할 수 없음을 익히 알고 있다. 초가집과 스위스의 예는 모두 한가지 중요한 관점을 빠뜨리고 있다. 철저한 사후적 논리이고, 외부인의 시각인 것이다.

나보고 누가 낙안의 초가집에서 사는 게 어떠냐고 권유한다면 나는 한마디로 거절하겠다. 보는 것과 실제로 사는 것은 별개의 차원이다, 혹이나 무늬만 초가이고 내부는 현대적인 가옥이라면 재고를 하겠지만. 실제로 조선시대라면 인테리어에 큰 기대를 걸지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초가집의 아름다움은 오직 외부인 만이 느낄 뿐이다. 거주자들에게 초가는 가난과 고통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새마을운동 노래에서 “초가집을 없애자고” 그렇게 목청껏 부르짖었던 것이 이런 연유이다.

전쟁이 그렇게 인류문화에 끼치는 공적이 크다면 계속 전쟁을 벌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때 위와 같은 주장을 펼치는 이들과 그들의 가족을 가장 먼저 전장터에 출전시키면 재미있을 것이다. 인류의 진보를 위하여 최 일선에서 활약할 기회를 갖다니 얼마나 영광스럽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아마도 기를 쓰며 펄펄 뛸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자기 몸, 자기 가족 중 일원이 부상을 당하거나 전사를 하게 되면 뼈저린 아픔을 느끼게 될 것이고, 그런 허무맹랑한 주장의 함정을 깨닫게 되리라.

전장에서 다치고 사망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그것을 단지 숫자로 인식하여 타자화(他者化)하지 말고 나 자신, 내 가족, 내 이웃과 친구라고 생각하면 사정은 달라진다.

‘불멸의 이순신’도 벌써 6권째다. 이순신 장군은 드디어 삼도수군통제사 직책에 오른다. 저 멀리 북쪽에 도망갔던 조정에서는 연일 공문을 내려 보내 부산포에 있는 적군을 공격하라고 성화가 심하다. 100여 척의 배로 500척에 이르는 적을 공격하라는 탁상공론의 극치다. 용맹하기 그지없는 장수들도 안절부절 못하고 어서 부산포를 공격하여 전쟁을 끝내기를 원한다. 쉽게 끝날 수도 있다. 공격 가서 모조리 몰살당하고 이어 왜군이 전라도를 돌아 곧장 국왕에게로 쳐들어간다면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필부의 용기가 있고, 군자의 용기가 있다. 원균의 용맹이 필부의 용맹이라면, 이순신이 보여주는 용기는 군자의 용기다. 전쟁에서 죽어가는 군사들과 살륙당하는 백성들, 그들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고 안타깝게 여긴다면 누구도 전쟁을 가볍게 여기지 못한다. 그 정신이 소중한 것이며, 이순신이 진정 불멸의 명장이 된 연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라크의 자이툰 부대를 파견할 때, 많은 논란이 있었다. 찬반양론의 대립이 극심하였다. 찬성론은 미국의 은혜에 보답하자는 것과 파병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내용이다. 국익에 보탬이 된다면 작은 희생이 따르더라도 파병하는 게 옳다. 누구도 그 논리에 당당하게 반대하지 못할 것이다. 大를 위해서 小를 바치는 정신은 뿌리깊은 미덕이다.

나는 한가지만 덧붙이고 싶다. 그 小가 남이 아니고 ‘나’라고 할 때도 당당히 小를 희생하라고 요구할 것인가. 의연히 희생에 자원하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사람들이 많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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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2.1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