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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으로부터의 탈퇴 - 국민국가 진보 개인, 반양장
권혁범 지음 / 삼인 / 2004년 2월
평점 :
참으로 무섭고도 도발적인 표제다. 국민으로부터 탈퇴하게 되면, 우리는 무슨 존재가 되는 것일까? 그럼에도 저자는 이런 대담한 용어를 거리낌없이 사용하고 있다.
스포츠경기를 시작할 때, 또는 무슨 행사를 거행할 때 다른 어떤 순서보다도 먼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차례가 있으니, 그것은 다름아니라 국민의례이다. '국기에 대한 맹세'와 '애국가 제창'은 간혹 생략되는 수도 있지만, 그걸 의식적으로 빠뜨린다는 것은 굉장한 파격이요 모험이기도 하다. 국기와 국가는 바로 나와 우리의 잠재적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국가중심주의'와 충성을 상징하고 있다.
서구와는 달리 시민사회의 발전이라는 자연스런 역사적 흐름속에서 근대국가 형성을 갖지 못한 우리네 사회에서 국가가 갖는 지위는 남다르다. 더우기 조선의 패망 후 일제에 의하여 수십년간 식민지배를 경험하였기에 나라없는 설움을 뼈저리게 체험한 백성들은 자기 한 몸을 희생하더라도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 위하는 마음자세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의 교육을 받아 왔고, 지금 만약 타국과의 전쟁이 벌어진다면 국가를 수호하기 위하여 전장으로 나가게 되는 것을 추호도 의심한 바 없었다.
저자는 진지하게 묻는다. 개인이 먼저인가 아니면 국가가 먼저인가를. 국가의 존재목적은 무엇인가를 새삼 반문하고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 있어 국가는 선험적 존재이며 무조건 정당하다고 간주된다. 오류는 정권이 저지르지 국가 자체는 가치판단에서 중립적 존재이다. 케네디의 유명한 연설처럼,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해야지 국가가 나에게 무엇을 해줄까를 요구해서는 안된다.
"국가적 정체성이나 애국심이 개인 삶과 행복의 수단이라는 인식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29쪽). 이것이 바로 작금의 우리들 인식이다. 그는 박정희에 대한 일부의 향수는 바로 이러한 강력한 국가주의의 상징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비판한다. "개인의 희생을 자동적인 담보로 삼는 안보는 가짜다"(68쪽)고 외치며, 개인의 존엄과 자유가 최고의 수호될 가치임을 천명하고 있다.
국가가 최상위 가치를 지닐때 다른 가치는 그보다 작은, 무시되어도 좋은 가치로 격하된다고 본다. 성과 계급의 문제는 국가보다는 하위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국가는 나와 남을 구분한다. 타국으로부터 자국을 지키려면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쉽다. 국가를 수호하기 위하여는 힘과 군대가 필요하며 이는 자동적으로 남성성에 대한 숭배와 여성에 대한 무관심적 배제를 낳는다.
이런 폭발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저자에게 신성한 국방의 의무는 더이상 신성하지 않다. 온국민이 열광해 마지않는 월드컵 열기조차도 매우 위험스럽게 비판받는다. 수십만명의 거리 응원과 '대~한민국'의 구호는 바로 내재된 국가중심주의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단층적으로 내보인다는 것이다. "온국민은 하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162쪽). 더구나 월드컵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닌가.
이런 유형의 논리에 대하여 반박을 해보고 싶어서 흠을 찾기 시작한다. 그래, 국가보다는 개인을 중시하는 서구적 가치체계에 입각한 편향적 비판일 뿐이다. 국가를 중시하는 게 반드시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나와 내 가족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것은 바로 국가다. 하지만 저자는 이미 이것을 염두에 두었다. "근대를 아직도 우리가 도달해야 할 이상으로 보는 발상은 근대적 사유의 틀에 무성찰적으로 눌러앉는 교조에 지나지 않는다"(59쪽)고 자신의 이론의 비절대적 논거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군부독재와 권위주의 문화에서 벗어난 지 일천한 우리 국민들은 여전히 그 깊은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개인의 소중함이 국가나 집단과 대등한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 예측하기 어렵다.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며, 소위 국익을 위하여 젊은이들을 전장터로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우리가 '국민'으로부터 탈퇴할 수 있게 되는 그 날, 우리는 진정으로 새로운 존재와 관계망으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저자의 의도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