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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정원 일의 즐거움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이레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헤세 자신이 꾸민 저작이 아님. 후세 편집자가 헤세의 글 중 헤세가 특히 사랑했던 정원에 관계된 글들을 모은 것이다.
오랜만에 헤세의 글을 읽는다. 집중적으로 헤세의 작품(소설)을 독파하고 나름대로 잡설을 끄적거린게 아득하다. 책장을 뒤적거리니 1993년 1월 10일자에 '헤르만 헤세의 소설에 나타난 인식 경향'이라고 적혀 있다. 요지를 대충 옮기면, 헤세는 초기의 '자연'에서 방랑, 각성, 문명비판과 동방정신 수용, 새로운 정신의 수립으로 이어지는 인식과정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그의 삶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또한 그의 인식범위는 개인 자신으로 초기에 국한되어 있었는데 각성이후 범위는 확대되고 심화되어 드디어는 온 인류로 발전하였다. 인류를 위한 새 정신의 모색과 인류에 대한 봉사, 그것은 헤세 자신의 모습으로서 유희 명인 크네히트를 통해 보여지고 있다. 뭐 대강 이렇다. 새삼 훑어보니 낯뜨거운 동시에 대견하기도 하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나은듯.
이 책에서 나는 헤세의 좀 더 내밀한 삶에 다가갈 수 있었다. 이전투구로 점철된 사회에서 한걸음 물러나서 자연과 벗삼아 삶을 영위하는 헤세, 바로 은둔자의 모습이다. 이렇게 자연에 묻힌 삶을 선호하는 것은 그의 후천적 천성이 아닐까? 하지만 그도 제1차 세계대전의 충격파를 비껴가지 못한다. 30대 후반의 헤세에게 그것은 가혹한 체험이었으리라. 여기서 새삼 초기 작풍과 명확히 구분되는 중기 작풍을 생각해 본다. 당시 <서구의 몰락> 등 서구문명의 쇠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드높아지고 있을 당시다. 야만성에 대한 대안 모색이 바로 헤세의 주테마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후기를 읽어보니 헤세에 대한 독일 내 평가는 상대적으로 높지 않았다고 한다. 독일인에게는 조국을 떠나서 스위스에서 안온한 생을 영위하는 헤세가 못마땅할 수도 있었으리라. 어찌보면 죽림칠현이 아니겠는가. 이는 표피로 현상을 섣불리 판단하는 오류에 다름아니다.
<유리알 유희>에서 헤세는 철학과 문학을 고차원적으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한다. 이것은 인간성 회복에 대한 웅변이며 침묵을 깨뜨리는 행동에의 의지다.
'정원에서 보낸 시간'은 역시 운문이므로 원어를 모른채 번역본으로는 제 맛을 음미하기 어렵다. 언제 독일어 공부를 하려나. '꿈의 집'과 '아이리스'가 특히 흥미롭다. 전자는 헤세 자신의 가족 이야기가 아닐까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후자는 헤세가 평생을 천착해 온 주제를 동화의 형식을 빌려 간결하며 깨끗하게 그린다.
'꿈의 집' 중 부자간의 대화에서 소개되는 최고의 곡인 바흐의 '악투스 트라기쿠스'(칸타타 106번)과 모차르트의 '아베 베룸 코르푸스'를 듣고 싶다. 나아가 헤세의 전작을 다시금 읽으면 어떠한 느낌으로 다가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