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피카레스크소설 대우학술총서 신간 - 문학/인문(논저) 433
김춘진 지음 / 아르케 / 1999년 4월
평점 :
절판


대우학술총서 433
 
피카레스크 소설의 발상지가 스페인임은 이의의 여지가 없다. 다만 장르의 본격적 시초를 <라사리요 토르메스>(1554)로 볼 것인가 아니면 <구스만 데 알파라체>(1599)로 인정할 지의 여부는 다소 논란이 있다.

이 저작은 세 작품 – 라사리요 토르메스, 구스만 데 알파라체, 사기꾼 –을 중심으로 스페인의 피카레스크 소설의 발생과 전개 및 장르의 특성 등을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초보적 저술”에 불과하다고 겸양하고 있으나, 실제 다루는 내용은 상당히 깊이 있는 분석이어서 작품을 읽었거나 읽을 독자에게 작품 이해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피카레스크 소설은 중세와 근대 문학을 잇는 교량적 역할을 맡고 있다. 근대 문학의 적자인 소설 장르의 출발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에 미친 피카레스크 소설의 지대한 영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돈 키호테>는 피카레스크 소설과 함께 로망스 소설에 대한 반발을 공유하며, 피카레스크 소설의 영향과 극복의 노력이라는 두 가지 가닥에서 이해해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이상주의적 로망스 소설이 현실과 이상의 거리를 거부하고 있었다면, 피카레스크 소설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오히려 부각시키고 있다.” (P.60)

“『돈 키호테』는 피카레스크 소설이 개척한 토양 위에서 맺어진 문학적 결실이기 때문이다.” (P.14)

피카레스크 소설의 발생은 16~17세기 스페인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 비롯한다. 피카레스크는 근대 도시의 부조리와 불균형을 폭로하고 있다(P.32). 근세 도시화의 물결은 당대 유럽 사회 도처에서 발생한 경향인데, 유독 스페인에서만 피카레스크 소설이란 독특한 문학 장르를 탄생시킨 연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신대륙으로부터의 부의 유입 규모의 거대성에 있다. 당시 스페인에 흘러들어온 재화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지만, 안타깝게도 그 부는 스페인의 근대화에 거의 기여하지 못하고(P.43) 그대로 국외로 유출되어 서유럽 국가로 넘어갔다. 부의 선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소수 지배층의 호화 사치는 극에 달했지만, 그 이상으로 하류 계급의 빈곤은 심화되었다. 전성기에서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하자 사회적 모순이 노정되고 사회적 불안정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경제적 상황이 스페인만의 종교적, 정치적, 인종적 갈등과 결부하여 유독 혈통과 명예를 중시하는 사회적 풍조가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피카레스크 소설과 주인공은 이중적 성향을 갖고 있다. 사회 밑바닥의 어두운 현실에 대한 직시를 통한 리얼리즘 인식과, 명예를 갈구하여 명예의 노예가 되는 억제할 수 없는 성향이다. 피카로는 결코 기득권층에 합류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결과는 언제나 좌절과 절망이다(P.91).

피카레스크 소설이 스페인의 특수성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여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떨어져 발생한 것은 아님을 저자는 지적한다.

“루치아노 식의 변신소설과 잡문, 기행 문학 등은 모두 리얼리즘 문학의 출현에 필요한 사실적 관찰과 구체적 현실 제시를 위한 서사 양식을 발전시켜 온 장르들이었다.” (P.82)

작품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라사로 출세기>는 피카레스크 소설의 기원인 동시에 세르반테스의 모태로 평가받는다(P.76). 이 작품은 해학적 리얼리즘이 두드러진다. 슬프되 슬퍼하지 않고,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역설적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경지. 이는 돈 키호테가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와 매우 유사하다.

저자는 작품의 형식에서 자서전체와 서간체, 대화체 등 피카레스크 소설의 형식적 요건이 모두 구비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즉 장르의 출발이지만 매우 완성도가 충실하다는 것이다. 작품의 의의도 남다르다. 르네상스기 인본주의 정신을 내적 원동력으로 삼아 여러 형식 요소들을 단순히 나열하지 않고 구조적 통합에서 얻어낸 서사적 구성 원리(P.124)를 발휘하고 있다.

<구스만 데 알파라체의 참회>는 직접 읽어본 작품이 아니므로 순전히 저자의 의견을 이해하는 수준에서 머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 작품은 희극적 리얼리즘과 실존주의적 고뇌가 결부된 이색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 피카로들은 한 곳에 정주하지 않는다. 항상 방랑한다. 구스만과 같은 이들의 방랑은 현실 도피와 체념을 모두 갖고 있다.

“방랑은 단순히 핍박을 벗어나는 해방이나 신분적 도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운명에 대한 체념의 의미를 내포한다.” (P.134)

구스만의 좌절은 이중적 분열의 결과이다.

“구스만의 좌절은 신분적 상승 노력의 좌절뿐만 아니라 도덕성의 좌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선과 악, 진실과 허위, 혈통의 순수성과 비순수성의 양극적 대립은 심리적 불안정을 일으킨다. 그 갈등은 계율적이고 규범적인 가치와 생존적 욕구 사이의 현실적 괴리를 말하는 것이다.” (P.135)

라사리요 토르메스의 비교적 단순한 사고관념과 구스만 데 알파라체의 의식은 극명한 대비를 보여준다. 이 점이 라사리요의 현실 타협과 구스만의 현실 부적응, 즉 실패를 예감케 한다(P.146).

구스만은 반종교개혁 시기의 내면적 갈등을 반영한다. 구스만은 피카로답게 반사회적 인물이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구원의 문제를 되짚고 있다는 점(P.141)에서 구별된다. 종교적 계율과 곤궁한 현실 사이에서 구스만의 이성과 본능은 끊임없이 갈등을 벌이고(P.136) 있다.

구스만의 참회는 단순한 기독교적 관점에서 해결되지 않는다. 외관상 종교의 승리로 비쳐지는 결말과 달리 문맥적 의미를 반추해 볼 때, 단순히 신학적 판단이 아니라 인간과 삶의 실존적 상황이라는 철학적 문제 인식이 보다 진실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P.144).

일전에 <사기꾼>을 읽으면서 개개의 일화는 흥미롭지만 하나의 작품 전체로서 쭉 읽어나가기에는 별로 재미없다는 느낌을 지녔다. 이것이 비단 나 혼자만의 잘못된 시각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사기꾼>은 통상 피카레스크 소설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작품이지만, 의외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대표적으로 일화들의 단순 나열로써 인과적 교직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견해다. 게다가 자전적 형식을 패러디하고 있어 주인공의 성격 발달이 불가능하여 작품구조 및 인물묘사가 입체적이 아니라 평면적 한계가 두드러진다.

“사건이 전개됨에 따라 인물의 반응 양식이 발달해 가는 인과적 교직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일화들의 염주식 나열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주인공의 인간적 생동감은 살아나지 않는다. 희화적으로 묘사된 광대의 모습만이 남는 것이다.” (P.152)

이는 작가인 케베도의 출신이 귀족계급이라는 점에 연유한다. 그는 라사리요와 구스만의 창조자와는 달리 피카로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다. 그에게 피카로와 같은 반사회적 존재는 사회 안정과 계급이익에 위험한 요소이다. 따라서 그는 철저히 피카로를 희화화하고 농락한다. 독자는 라사리요와 구스만에 대해서처럼 파블로스에게 동정심을 갖지 않는다. 완전하고 철저한 광대의 배역, 이를 충실히 수행하는 파블로스에게 오히려 역설적으로 측은함을 느끼게 할 정도다.

“께베도의 분노에 찬 응징에도 불구하고 억압적 응징의 목소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빠블로스가 희화적이 되면 될수록, 더 강도 높게 그의 꼭두각시 놀음은 인간적 몸짓으로 바뀌어 보인다.” (P.187)

<사기꾼>에게서 진정한 피카레스크의 미덕을 발견할 수 없다면 이것의 의의는 무엇일까? 저자는 언어미학의 탁월성을 지적한다.

“그의 소설은 언어적 굴절의 극치가 이룬 미학이며 현실 표현의 농축도를 높일 수 있었던 피카레스크 미학의 진일보를 의미한다.” (P.154)

즉, 작품의 내적 의미가 아니라 언어 표현상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번역본이라는 필요악을 거쳐야 하는 우리 같은 이들에게는 전혀 와 닿지 않는다. 따라서 작품의 결함 내지 부정적 측면만이 두드러질 뿐이다.

피카레스크 소설의 문학사적 의의는 이미 서두에 언급하였지만 그렇다면 인간적 측면에서는 무엇인지 저자의 말로 살펴본다.

“피카레스크 소설은 근대 사회에서 개인이 불가피하게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던 사회와의 갈등과 그 갈등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개인의 주체적 의식을 보여 준다.” (P.192)

“피카레스크 소설의 해학은 소외를 극복하고 휴머니즘을 향해 나가는 전진이며, 사회적 권력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향하는 희망이며, 인습의 허울을 벗고 개인의 진정성을 지향하는 인문주의 시대의 문학적 상상력의 결실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P.254)

마지막 장은 피카레스크 소설의 정전과 아류를 다루고 있다. 여성 피카로를 내세운 <안달루시아 여인 로산나>와 <피카라 후스띠나>를 소개하고 있으며, <속 라사로 출세기>와 기타 작품들도 살펴본다.

저자는 피카레스크 소설은 스페인 중심에서 인식한다. 피카레스크는 스페인에서 탄생하고 짧은 절정기를 누린 후 쇠퇴한다. 유럽 각국에 미친 피카레스크의 영향을 분명히 긍정하지만 이들이 예술적 완성도와 문학사적 중요도에서 결코 스페인의 영광을 회복하지 못하였으며 이류 장르로 몰락하였음도 잊지 않고 지적한다.

이러한 견해는 피카레스크를 매우 엄격한 범주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저자가 언급한 시대적, 형식적 요건을 완비하는 작품은 사실 몇 편에 지나지 않는다. 피카레스크와 피카레스크 적인 것을 엄격히 구분하는 실익은 무엇인가? 사실 넓게 보면 <돈 키호테>를 피카레스크 장르에 넣어도 큰 잘못은 아니다. 더구나 피카레스크가 야기한 근대 소설의 리얼리즘과 다양한 분화는 그의 정전을 명확히 하기 어렵게 만든다. 어찌 보면 귀족계급이 아닌 평범한 중하류 계층의 사람들이 등장하여 지지고 볶는 모든 유형의 작품은 결국 피카레스크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피카로와 피카라의 속성이 자리 잡고 있다. 차이점은 우리는 사회규범과 도덕에 순응하지만 그들은 이를 거부하고 떨치고 일어나는 데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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