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도스섬 공방전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5
시오노 나나미 지음, 최은석 옮김 / 한길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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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 함락>에 이은 제2편이다. 시대적 배경은 전작의 사건이 일어난 지 약 70년 후, 장소는 성 요한 기사단이 점유하고 있던 로도스 섬. 지도를 보면 크레타와 키프로스 사이에 아나톨리아 반도 쪽으로 바싹 붙어있다.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킨 후 그리스와 세르비아에 이어 시리아, 이집트까지 정복하여 명실공히 동지중해의 패자로 우뚝 선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신경쓰이는 존재가 셋이 있었다. 키프로스, 크레타와 로도스이다. 하지만 키프로스와 크레타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소유지. 당시 베네치아는 막강한 해군력을 보유한 나름대로의 대국. 해군력이 빈약한 투르크가 굳이 무리한 시도를 전개하긴 위험도가 높다. 게다가 베네치아는 무역국가로서 투르크와도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 로도스 섬의 성 요한 기사단은 철저한 기독교 전사로 틈만 나면 투르크 세력을 공격하여 그 물질적 피해와 아울러 대국 오스만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있는 형편이다. 이제 대충 커다란 정복사업과 안정화가 마무리된 시점에서 이들 '입안의 가시'를 그냥 놓아둘 수는 없었을 터이다.
 
과거에 이미 한차례 공방전이 펼쳐진 선례가 있었다. 이는 오히려 성 요한 기사단의 사기를 고취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제 오스만 제국의 최고 명군으로 나중에 추앙받는 술레이만 대제에 이르러 재차 축출을 시도한다. 술레이만 대제는 확실한 해법을 들고 나왔다. 충분한 물량작전과 안정적인 군수보급으로 수비측의 5개월에 걸친(콘스탄티노플은 2달을 버티지 못했다) 선방에도 불구하고 군수물자의 부족과 물량공세의 한계로 패배는 시간문제로 다가왔다.

술탄의 너그러운 처사로 성 요한 기사단은 안전하게 퇴각할 수 있었다. 비록 지켜내지 못하여 자긍심에 타격을 입었지만 어찌보면 그만큼이나마 버틴 자체가 경이적이라고 할 만하다.

공방전 자체보다도 후일담이 더 재밌다. 로도스 섬에 쫓겨난 성 요한 기사단은 수년간 방랑하다가 몰타에 정착하여 몰타 기사단이 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다시 한 번 오스만의 공격을 받게 되는데, 이때 기사단장은 로도스 섬 공방전에도 참전했던 발레트라는 기사였다. 이번에는 방어전에서 성공을 거두고 근거지를 지키는데 성공한다. 그후 나폴레옹에게 쫓겨난 후 바로 현재까지도 로마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고 하니 역사적 화석의 신세는 면한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흔적은 몰타 공화국의 국기와 수도 이름에 그 진한 자취를 남기고 있으니 더욱 흥미롭다.

이쯤에서 던지는 질문 하나. 그들은 무슨 연유로 최전선에서 이슬람과의 투쟁에 앞장섰을까?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은 모두 공격해도 괜찮은 악인들이라고 정말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가? 문득 리차드 도킨스의 신작에서처럼 종교가 없었다면 이런 사태가 발생하였을까 궁금하다. 자신의 믿음과 신념에 투철한 그들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멋지지만 그러한 태도가 올바른지는 현시점에서라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투르크가 보다 관대한 점이 흥미롭다. 그들은 로도스 섬의 기사와 주민을 몰살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귀찮게 하는 존재를 몰아내는 데 의의를 둔 것이다.

종교와 신념이 상이하다고 일방의 것을 강요하며 또한 폭력을 행사해서는 것은 무엇보다도 잘못된 짓이다. 이와같은 인간 내적인 영역은 개인의 자유와 양심에 맡겨두어야함을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그럼에도 기독교와 이슬람세력의 갈등은 천년이 지나도 줄어들지 않았으며, 탈레반의 샘물교회 봉사단 납치는 여전히 갈등이 현재진행형임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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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6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8.13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