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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생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4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평점 :
영화에 로드 무비가 있다면, 이 작품은 '로드 소설'에 적합하다. 적어도 중반부까지라도. 오르한 파묵. 노벨문학사 수상자로 성가가 높다. 더구나 터키 출신의 비서구권이라 진정한 실력파라고 생각되었다.
겨우 한 작품 가지고 작가의 작품세계를 예단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작품 해설을 보면 <타임스>가 "현대의 가장 특이한 작가들 중의 한 명"(P.390)이라고 하였다는데 여기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더구나 이 작품은 그리 녹록치 않다. 파묵의 미덕이 서사성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분명히 서사는 서사인데...굳이 분류하자면 순수한 서사 보다는 상징적 서사에 가깝다. 전체 플롯은 존재하지만, 이것이 사실성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모호한 안개에 둘러싸여 있다. 작품 해설에서도 그 점을 언급하고 있다.
"그가 서술하는 것은 구체적인 삶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들'의 세계이자 실상이며, 그 이미지들이 다양한 의미로 인용되는 구조다."(P.391)
하긴 출발부터 그러하다. 어떤 책을 읽고 나서 '새로운 세계'에 대해 자각하고 '새로운 인생'을 찾아 나선다. 이 부분이 마치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묘사된다. 잔뜩 독자를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는 정작 그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작품 내내 언급이 없다. 도대체 무슨 책이길래 그렇게 인생의 근간을 흔들어 놓는지.
"책 한 권을 읽은 후로 인생이 송두리째 변하고, 사랑에 빠지고, 새로운 인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나였다."(P.63)
작품은 무심하게 흐른다. 오스만의 자각과 여학생 자난의 만남, 메흐메트와 자난의 실종.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찾아 방랑 중 재회. 이어서 나린 박사와의 운명적 만남. 그렇다, 그것은 운명적이다.
오스만의 차가운 분노는 자난과 메흐메트가 자신을 속여서 그 책에 빠져들게 한 데 대한 것이 아니다. 덕분에 수년의 세월을 도로에서 보내기는 했지만, 자난과 행복한 동행을 하였다. 오스만은 여전히 '새로운 인생'을 갈망하고 있다. 그 책의 저자를 알게 되고, 그것의 신비로움의 꺼풀이 벗겨졌다. 그러나 그는 이를 뿌리칠 수 없다. 자신의 온몸과 영혼을 바치려고 하였던 그것. 그것을 쉽사리 놓지 못한다. 그러기에 그는 시골에서 개명하고 평온한 삶을 영위하는 또다른 오스만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바라마지 않는 모습이었으므로.
"그의 인생이 이미 자리를 잡았고 책 속의 표현처럼 '정상 궤도에 들어섰음'을 나는 보았다...내면의 평화를 찾아냈던 것이다...그가 찾았던 균형의 평온은 그에게 결코 끝나지 않을 영원한 시간을 주었다."(P.286)
나린 박사는 다소 비극적인 동시에 희화적이다. 서구화, 개방화에 저항하여 전통적 가치와 고유성을 옹호하려는 그와 대리점주 모임의 노력은 일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그는 그 책을 읽고 새로운 인생을 구하는 사람들을 죽인다. 자신의 아들이 변한 게 그 책이라고 판단하고 말이다.
"모든 것이 단지 하나의 책이 만들어 낸 것일까? 그 책은 거대한 음모의 아주 작은 도구일 뿐이야."(P.181)
"우리 젊은이들이 이러한 유의 속임수에 넘어가 '자기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고 생각하고, 한두 권의 책을 가지고 '모든 세상을 혼란케 한다는 것'을..."(P.184)
나린 박사의 집에서 헤어진 여학생은 결혼하고 독일로 간다. 오스만도 일상으로 복귀하여 결혼하고 아이도 낳는다. 그리고 은둔한 오스만을 죽인다. 14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찾아다닌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 캐러멜 창안자를 만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천사를 만난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생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 그토록 고대하던 찰나와 영겁의 시간.
이 모든 굴곡을 작가는 극적으로 전개하지 않는다. 세부적인 묘사를 피하고 슬렁슬렁 넘어간다. 그 부분은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강물의 물결마냥 담담히 흘려보낸다. 그것이 인생이라고.
새로운 인생. 파묵이 말하는 '새로운 인생'이 무엇인지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새로운 인생은 따로 없는지 모른다. 아니면 일상의 나날이 새로운 인생 자체일 수도 있다. 아니면 떠도는 길 위에서 마주치는 또는 방황을 멈추고 이제는 고요히 정착하는 모든 게 새로운 인생인가? 어쩌면 파묵은 이 모든 열려진 결말(open ending)을 우리가 생각해 보도록 권유하고 있나 보다. 그게 그의 의도라면 그는 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