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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스케치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2
도리스 레싱 지음, 서숙 옮김 / 민음사 / 2003년 8월
평점 :
그래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작품을 한 번은 봐주는 게 예의가 아닐까 구입하였다. 독서 후 소감은 우선 나름 괜찮은 선택이었다는 것.
요즘 국내에서는 노벨문학상 발표시기가 다가오면 언론에서 괜한 기대감을 부추긴다. 국내 작가도 수상할 때가 되었다느니, 이번에는 아시아권이 차례가 되지 않겠냐 등등. 일부 작가도 부화뇌동에서 괜히 들썩거린단다. 가소롭다. 노벨문학상이 대륙별, 국가별 안배로 정해지는 나눠먹기라도 되는지. 그렇게 노벨상을 받고 싶으면 뛰어난 작품을 쓰던가. 솔직히 모 시인이 후보라는 사실조차 나는 아연해지고 만다. 이름은 자자하지만, 그 시인의 대표작이 뭐더라. 들어본 적도 읽어본 적도 없는 난 뭐지?
이 단편 모음집에서 레싱의 특질을 파악하는 건 무리라고 본다. 장편 작가에게 단편은 말 그대로 개인과 사회의 편린을 살짝 비쳐주는 수준이므로. 그럼에도 레싱을 통해 한번도 가보지 못한 런던의 속살, 런던의 사람사는 내음을 얼핏 맡았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문체는 간결하고 화려하지 않다. 언뜻 평범하지만 오히려 고졸(古拙)하다는 느낌이 먼저 다가온다. 노작가의 담담함과 사물을 바라보는 여유로운 시각이 배어나온다. 제목 그대로 관찰과 스케치를 하는 작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나도 작가의 눈을 빌려 런던의 일상을 들여다본다. 아, 거기도 사람사는 곳이구나. 사는 방식은 우리랑 별 차이없네, 이런 동질감은 안도감을 자아낸다.
'데비와 줄리'에서 미혼모가 되어 낳은 아기를 몰래 버리는 어린 여성. 우리나라도 점차 사회적으로 이슈화되는 문제다. '참새들'과 '공원의 즐거움'은 스케치라는 느낌에 가장 부합한다. 자잘하고 소소한 일상의 장면들, 왠지 웅장하고 극적이어야 대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시대에, 진실은 작고 단순한데 있다는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공명한다.
'흙구덩이'와 '진실'은 헝클어진 부부관계를 보여준다. 이혼이 전혀 낯설지 않은 사회. 전자는 그래도 심리적 타격이 여전히 극심함을 나타낸다. 너무나 닮았기에 상반되는 여성에 이끌려 가정을 떠난 남자. 하지만 이제는 다시금 편안함이 소중하게 다가와 전처에게 다가온다. 전처의 선택은? '진실'은 이혼 부부와 각각의 재혼 파트너의 관계를 다룬다. 이혼하면 원수처럼 지내는 것은 대체로 우리나라의 문화인지 이들은 친구처럼 자연스레 어울린다. 주말동안 같이 지내면서 새로운 파트너들은 한 가지 불편하지만 명확한 진실, 즉 원래 커플이 다시금 재결합하는 게 옳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기 실려있는 18편은 분량상 단편과 꽁트를 넘나드는 다양함을 보여준다. 때로는 길게 어떤 것은 매우 짧게. 그야말로 스케치의 형식에 부합되게. 그렇다면 스케치의 정신은? 작가의 시선에 비친 런던 사람들, 나아가 현대인들의 삶의 다양성과 변이, 궤적이다.
사족. 적어도 단편소설의 수준은 국내가 매우 뛰어나다고 느꼈다. 우리 작가가 원래 단편에 강한지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 이 작품집을 읽으면서 역설적으로 국내 단편이 얼마나 역동적이고 미묘한 암시, 극적인 반전과 진지한 결론 등 재밌으면서도 탁월한지 재인식하게 되었다. 우리네 작가들이여, 더 힘을 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