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들의 사생활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평점 :
품절


이승우는 독특한 작가다. 특이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가장 정통적인 소설작법을 구사하고 있다. 요즘 톡톡 튀는 신세대 작가들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지친 독자라면 기쁘기 그지없을 것이다. 재기발람함을 압도하는 성실함과 우직함이 그의 소설 미덕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생의 이면>에 이어 두번째 펼쳐든 작품에서도 그의 특성은 큰 변함이 없다. 칠년이 경과하였지만 그는 섯부른 꼼수를 부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는 '사랑'을 다룬다. 그의 사랑이란 표피적이고 찰나적이지 않다. 어쩌다 술김에 하룻밤 같이 자고 가벼운 말다툼 끝에 절교를 선언하는 그런 유치함과는 비교하지 말자. 그의 사랑은 인간의 존재론적 질문과 맞닿아 있다.

박부길과 기현은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러나 사랑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들은 자신의 과도한 열정과 집착이 사랑의 뜨거운 표출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기현은 순미의 집에 찾아가는 무모함을 보인다. 마치 그녀가 그를 뜨겁게 맞아줄 것을 믿어마지 않으면서.

우리는 새로운 가전제품을 구입하면 사용설명서를 한번 훑어본다. 기본 작동이야 할줄 알지만 세부기능을 알기 위해서다. 마찬가지로 휴대폰 제품상자에는 두툼한 설명서가 따라온다. 반면 제대로 사랑하기 위하여 또는 잘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학을 공부하는 사람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사랑은 그저 본능에 충실하면 된다는 것일까? 그런 면에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퍽이나 선구적이다. 우리 모두는 사랑에대하여 진지하게 공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사랑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덕목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모든 나무들은 좌절된 사랑의 화신이다"(P.220)

이 한 문장이 이 소설의 모든 것을 대변한다. 우현은 때죽나무와 소나무를 보면서 이루어지지 못한 순미와의 영원한 사랑을 갈구한다. 남천의 야자나무는 기현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가 사랑했던 사람의 사랑의 아이콘이다. 또한 우현과 순미를 잇는 연결점이기도 하다.

해설에서도 지적했듯이 기현-순미-우현의 단선적 삼각관계는 아버지-어머니-비서관으로 이어지는 선행 관계의 복사판이다. 사랑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고 기현은 나직이 되뇌인다. 상호간의 뜨겁고 격렬한 사랑에서 나무처럼 한발 떨어져서 고요하고 은은한 사랑까지. 일방적 사랑과 쌍방적 사랑은 어떠하며 다자간의 사랑은 무엇인가. 작중 아버지와 어머니의 전혀 표출되지 않는 사랑도 있다.

이승우는 이지적이며 냉혹한 작가이다. 박부길이나 기현은 따뜻하고 바람직한 가족생활을 누리지 못하였다. 박부길은 어머니를 빼앗기고 아버지를 죽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묘를 불태우고 고향을 떠난다. 기현은 어떤가. 건조한 가정에서 우수한 형에게 가리워져 소외당하다가 형의 사진기를 들고 역시 가출한다. 그리고 이것의 파장으로 형은 두 다리를 잃고 정신적 장애마저 겪는다. 어설픈 해피엔딩의 미덕을 보여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우현의 욕정을 달래주기 위하여 어머니가 그를 업고 연꽃시장을 드나드는 모습은 쓰디쓴 모정의 착잡함을 안겨준다.

그나마 사랑에 실패하는 전작에 비해 조금이나마 상황 호전의 여지가 엿보이는 점에서 일말의 변화가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시선이 조금은 누그러진 듯 한데 과연 그럴지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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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10.26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