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길
이스마엘 베아 지음, 송은주 옮김 / 북스코프(아카넷)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예전에 읽었던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제목의 책이 떠오른다. 유고 내전을 파헤친 일종의 현장 다큐인데, 그때 인간이란 존재의 철저한 잔인성에 새삼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집으로 가는 길>도 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무대는 아프리카 서부의 자그만 나라, 시에라리온. 영화 <블러드 다이아모드>가 되는 국가이며, 영화의 주제와도 일맥상통하고 있다. 다만 차이는 기자가 아니라 피해 당사자 자신의 증언이라는 점. 그리고 그 당사자는 당시 10대 초반의 어린이라는 것이다.

내전의 배경은 명확하지 않다. 정치체제가 불안한 신생 독립국에게는 군부의 쿠데타 위험이 항시 존재한다는 것. 어떤 계기가 생기면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소위 국가체제와 사회질서를 바로잡기 위하여 '구국의 결단'을 내린다. 이때 칼은 붓보다 힘의 우위를 가진다.

풍요롭지는 않지만 불행하지도 않았던 흑인 소년. 내전이 발발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미국 흑인음악인 랩을 가지고 장기자랑에 춤추려고 이웃마을에 간 동안,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이어지는 생사의 고비를 무수히 넘기는 처절한 피란길. 때로는 흥미진진함을 자아내지만 순간 정신을 차린다. 이건 소설이 아니라 논픽션임을. 내가 그 자리에 있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사람 하나 죽이는 것이 물 마시는 것보다 쉽다는 한 마디. 사람 목숨값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천양지차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따위는 아예 떠오르지도 않았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 물 한 잔 마시는 것처럼 쉬웠다. 첫 번째 살인을 하면서 내 마음은 찰깍하고 문이 닫히듯 잠겨버렸다. 양심을 괴롭힐 만한 기억도 머릿속에 남기지 않게 되었다." (P.178)

어쩔수 없이 소년병이 되어 인명살상의 도구로 이용된다. 그에게는 부모형제를 죽인 자에 대한 복수이기도 하다. 살아가자면 다른 대안이 없기도 하다. 도구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죄책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도 안된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자연스레 마약이 주어지고, 학살과 마약은 일상 생활이 된다.

"나는 그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느끼지 않았다. 내가 하려는 일에 대해 그리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다...그 포로는 내 부모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반군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나는 그 남자의 목을 꽉 움켜쥐고 물 흐르듯 유연한 동작으로 목을 베었다." (P.182)

수 년이 경과했지만, 소년병 시절의 체험은 그로서도 상기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전체 분량 중에서 피란 장면이 길게 등장하는 반면, 약 2년간의 소년병 시절은 비교적 축소되어 서술하고 있다. 하긴 폭력과 학살의 연속이니 무얼 자세히 묘사하겠는가.

운좋게 목숨을 유지한 이스마엘이 유니세프를 만난 것은 커다란 행운이다. 고통스러운 재활과정은 한번 어린이를 타락시켰을 때 그 내상의 정도를 뼈저리게 각성하게끔 한다.

"순진한 외국인들은 우리를 전쟁터에서 떨어뜨려놓으면 RUF에 대한 증오가 식을 줄 알았던 모양이다. 환경이 바뀐다고 그 즉시 우리가 평범한 소년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우리는 사람을 죽이도록 세뇌된 위험천만한 아이들이었다." (P.197)

그리고 유엔 대표로 출국했던 일-여기서 시골뜨기의 뉴욕 방문기가 재밌다-과 돌아와서 다시금 내전의 재개와 재회.

그는 선택의 처지에 놓였다. 소년병이 되어 죽이든가 민간인으로 남아 죽임을 당하든가. 그의 선택은 조국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여곡적 끝에 옆나라 기니에 도착한다. 어릴때 들었던 원숭이 사냥꾼의 딜레마 이야기의 회상이 마지막을 장식한다.

시에라리온 내전은 2002년에 공식적으로 종전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수많은 국민들이 전쟁의 여파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보고가 계속된다. 극심한 경제적 궁핍과 팔 다리의 훼손 후유증, 정신적 충격. 여기에 언제 재발될 지 모르는 불안한 평화체제 등.

누구도 이스마엘을 비롯한 소년병들을 손가락질 할 수 없다. 유네스코의 직원들이 '너희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은 입에 달고 지낸 것은 결코 입에 발린 말이 아니다. 이제 에스더가 이스마엘에게 한 말을 나도 해주고 싶다.

"그 어떤 것도 네 잘못이 아니야."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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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8.2.21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