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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흐테르 - 회고담과 음악수첩
브뤼노 몽생종 지음, 이세욱 옮김 / 정원출판사 / 2005년 10월
평점 :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 내가 경애하여 마지않는 피아니스트 중의 하나다. 그동안 음반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를 접했다면, 이제야 비로소 그의 육성을 듣는다.
리흐테르는 가까이하기 녹록치않은 인물이다. 그는 청자에게 바싹 의자를 당기지 않는다. 연주자를 화려하게 드러내기 보다는 음악의 참모습을 보여주는게 연주자의 진정한 자세라고 믿었다. 그런 면에서 그보다 더 개성적인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다가서고 싶지만 그는 여전히 내게 반쯤 등을 돌리고 있다.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의 깊은 맛을 느끼게 주었던 리흐테르. 글렌 굴드 못지 않은 독특하지만 또다른 깊이를 보여준 바흐의 평균율. 무엇보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비슬로키가 아니라 잔데를링 협연)에서 보여준 선입관을 깨뜨린 중후하며 강단있는 해석이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주력이었던 슈베르트, 슈만 등은 여전히 귀에 설다.
인간 리흐테르가 어떤지는 궁금했지만 알 수 없었다. 그의 연주력과 해석의 배경에 대해서도. 그의 기이한 교육시절은 어떠한지도. 이제 이 책을 통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전반부는 그가 몽생종에게 털어놓은 회고담이다. 죽기 몇 해 전, 그는 뭔가를 예감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자신에 관한 신화와 전설을 견딜 수 없어했는지도.
"내가 연주를 하는 것은 청중을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연주한다. 내가 내 연주에 만족하면, 청중 역시 만족한다. 연주를 하는 동안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건 작품과 관련된 것이지 청중이나 성공을 겨냥한 것은 아니다...내가 청중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않을수록, 나는 더욱더 연주를 잘 한다." (P.126)
그의 연주 자세를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는 인기에 무덤덤했고, 자신의 연주에 엄격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타인의 연주에 대해서도 엄격함은 여전했다. 글렌 굴드, 미켈란젤리, 가브릴로프, 콜라르, 데즈 랑키 등등.
그는 연주자의 화려한 쇼맨십도 혐오하였다.
"연주자란 하나의 거울이다.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자신의 개성으로 음악을 오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음악을 연주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P.233)
"무릇 연주가란 하나의 실행자다. 작곡가의 의지를 정확하게 실행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작품 속에 이미 있는 것만 들려줄 뿐 아무것도 보태지 않는다...그는 음악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 속에 녹아 들어가야 한다. 나는 스스로를 안에 가둠으로써 자유를 얻었다." (P.245)
표피적 아름다움을 버렸기에 그의 음악은 성실하며 진실하다. 스스로를 안에 가두어 내적 충만을 얻었으므로 그의 터치는 대체로 화려하지않고 소박하며 묵직하다.
회고담을 통해서 그는 공연 취소를 자주 한다는 세간의 편견을 불식시키려 하였다. 그는 까다로워서가 아니다. 누구처럼 전용 피아노와 전속 조율사, 또는 요리사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의 소련시절 연주 활동을 보면 조그만 시골동네 마을 회관이나 학교에서도 즐겨 연주하였다. 다만 그는 몇 년 후의 스케줄을 예약하거나 꽉짜인 틀을 싫어하였던 것이다. 자유로움에서 참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기에.
특히 흥마로운 점 중의 하나는 그와 프로코피에프, 그와 쇼스타코비치의 관계다. 프로코피에프와는 깊은 정신적 유대관계를 맺었는데, 쇼스타코비치와는 그러하지 못했음을 알게 된다. 그건 두 사람의 성격에도 연유한다. 외향적인 프로코피에프와 내성적인 쇼스타코비치. 요즘 연주자들은 프로코피에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궁금하다.
이 책의 독자는 리흐테르가 얼마나 인간적인 사람인가 놀라게 된다. 스스럼없이 동료 후배 연주가들과 어울려 즐겁게 보내는 그의 모습은 어린아이를 연상케 한다.
후반부는 그가 반평생에 걸쳐 적어두었던 음악 수첩이다. 연주자는 대개 타인의 연주회 또는 음반을 잘 듣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는데 그는 틈만 나며 음악을 가까이 하였다. 여기서 나와 같은 일반 음악감상자의 동질감이 느껴진다. 나는 이렇게 들었는데 그는 또 다르구나 하는 차이점과 아울러 공감대도.
개인적으로 관심가는 몇 부분을 발췌한다.
먼저 말러의 6번 교향곡의 수첩을 들여다본다. "다만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다. 제발 1악장 다음에는 스케르초가 아니라 안단테로 연주해 주면 좋겠다! 그 편이 훨씬 낫다!" (P.292)
"나는 이 오페라를 음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통째로 외우고 있다. 만일 이 작품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P.459)
프란츠 슈레커의 <아득한 울림>이라는 낯선 작품이다.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 뿐이다. 아울러 강렬한 호기심이 생긴다. 도대체 어떤 음악일까? 나도 한번 들어봐야지.
마지막으로 원본에 없는 서울 공연(1994.4.15/4.18) 감상평을 번역본에서 실어놓았다. 리흐테르가 방한 공연도 했던 모양이다. 정명훈 지휘의 오페라 살로메와 생상스의 오르간 교향곡을 평하였는데, 오페라는 그다지 호의적인 평은 아니다. 그럼에도 지휘자는 높게 평가했는데 괜시리 내 기분도 흐뭇해진다.
"하지만 지휘자가 높은 경지에 올라 있다는 것과 매우 의지가 강하고 열정적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P.499)
"지휘자는 갖가지 훌륭한 자질과 진정한 열정을 겸비하고 있다...이 지휘자가 한국의 청중을 상대로 대성공을 거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P.500)
이제 리흐테르의 연주를 듣는 내 마음가짐은 전과는 다른 면모를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높이 평가했던 작곡가(림스키-코르사코프, 브리튼 등)나 연주자(올레그 카간, 나타샤 구트만, 갈리나 피사렌코! 등)의 음악에도 관심을 더 기울여 볼 생각이다.
이렇게 짤막하게 촌평을 남기지만 이 책은 일회성이 아닌 재음미할 가치가 충분하다. 아울러 몽생종의 영상물도 꼭 찾아 보려고 한다. 비바 리흐테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