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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 - 설득과 통합의 리더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대중사학자 이덕일의 근래 역작이다. 남작으로 인한 옥석의 구분은 독자의 몫이지만 어쨌든 일반 독자의 호응을 받는 이가 이덕일이다.
역시 이덕일의 장점은 인물을 중심으로 새로운 시각을 접근하여 재평가를 내리는 데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하필 유성룡일까?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을 추천하고 옹호한 이, <징비록>의 저자. 이것이 우리가 유성룡에 대해 대체로 아는 바다. 그래서 TV 사극을 보더라도 이순신은 주인공으로 비중있는 연기자가 맡는다면 유성룡은 무난한 중견 연기자가 맡는게 통상이었다.
저자는 사실 유성룡이야말로 임난 극복의 일등공신이자 조선왕조의 재건자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또 그 공적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무대에 쓸쓸히 파묻힐수 밖에 없는 참담한 진실도 알려준다.
유성룡의 소위 동인의 거두로 일컬어진다. 하지만 그는 사고와 행동은 언제나 당파의 경계를 초월하였다. '동인 '이라는 딱지는 남들이 붙인 것이지 그는 당파에 무심하였다. 그러기에 그는 임란이라는 미증유의 위기에서도 동과 서의 대립에서도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덕일은 여기서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과 유성룡의 반대라는 신화적 허구를 고찰한다. 십만양병설을 유성룡이 반대하여 왜침을 대비못했다는 원죄라는 설 말이다. 그에 따르면 이는 완벽한 후대의 조작이라는 것이다. 정권을 잡은 서인이 자신의 우너조인 율곡을 높이기 위한 요즈말로 역사왜곡을 시도한 것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역사는 결코 불편부당하지 않다. 작금 뉴라이트 일각에서 대안 역사교과서를 만든다고 법석이다. 거기서는 이승만이 건국의 아버지로 중대하게 다루어지고 백범 선생은 스쳐지나간다. 419의거도 마찬가지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근대화에 기여한 바도 제법 평가해준다 등등. 철저하게 극우파, 아니 친일파의 후손다운 자세다. 그래야 자신들의 뿌리가 당당할 수 있으니까.
유성룡의 새로운 면모는 눈부시다. 대동법을 선구적으로 시행하였고, 실효를 상시한 제승방략제를 진관제로 변경하였으며, 능력있는 이는 신분을 타파하고 임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양반도 병역의무를 이행하게 하였다. 극심한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하여 상업을 통한 물자 교류를 장려하기도 한다.
이 모든 정책은 단기적으로 임란 극복을 위함이자 장기적으로 조선의 재생과 이상사회의 건설을 도모함이다. 반면 지배계급에는 중대한 특권침해로 다가왔다. 특히 신분제에 대한 도전은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임란 위기의 종결이 임박하자 유성룡은 바로 개혁 역품을 맞아 향리로 쫓겨났고 그의 개혁은 수백년으 세월을 인내해야 했다. 이는 사대부의 반발과 유성룡의 명성에 대한 임금 선조의 시기심이 상승작용을 일으킨 결과였다.
수년전 이순신의 고뇌와 내면에 맞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오랜만에 서애 유성룡 역할을 비중있는 연기자가 맡게 되어 기대가 컸다. 하지만 한계는 어쩔수 없는 듯, 용두사미를 보게 된다.
부제처럼 유성룡은 '설득과 통합'으로 이 모든 결과를 낳았다. 자기 세력을 만들지 않았으니 힘의 우세를 과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국론 분열로 희대의 국란이 발생했으므로 사분오열된 민심과 국토를 다시 일으키기 위하여 반대파를 설득하고 백성을 통합하는데 주력하였다. 그에 공감하고 함께 일한 이가 이항복, 이덕형, 이원익 등이다. 그의 추천을 받아 크게 등용된 이가 권율, 이순신 등이다. 이것만 보아도 역사에 대한 그의 공적을 헤아릴 수 있다.
그럼에도 역사는 그에 무심하였다. 비단 조선 뿐만 아니라 현대도 마찬가지다. 이는 우리가 아직 당파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요즘 정치를 보면 알 수 있다. 공천혁명과 대국민사기극이라는 극단적 주장이 난무한다. 어찌되었든 자기 세력을 많이 확보하기 위하여 무리수를 강행한다. 잘하면 아우 대통령에 형님 국회의장을 볼 수 있는 드문 기회다. 부부 대통령이 탄생한 남미나, 정권을 계속 붙잡기 위하여 대통령이 총리가 되는 러시아마저도 놀랄지 모르겠다.
새삼 유성룡 같은 이가 그리워짐은 나만의 소회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