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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몽 - 성진과 여덟선녀가 꾼 봄꿈 한 자락 ㅣ 겨레고전문학선집 21
김만중 지음, 림호권 엮음 / 보리 / 2007년 1월
평점 :
겨레고전문학선집 21. 북한에서 번역 출간한 우리고전문학을 간행하는 시리즈이다.
명성 높은 소설임에도 교과서에서 일부만 접하였을 뿐 작품 전체를 일독하기는 처음이다. 예상보다 분량이 제법 되어 먼저 놀랍고 내용도 비교적 흥미로워 재미라는 측면도 만족시킨다. 역시 허명이 아니구나!
2처 6첩을 거느리는 것은 봉건적인 당시로서도 불가능한 것일 테니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의 변함없는 불행한 로망일 것이다. 또한 국내 몽자류 소설의 비조가 되고 있으니 소년 출세, 미녀 취처, 자손 번창 등이 다 그러하다.
고전소설의 표제를 보면 소위 몽자류가 상당 분량을 차지한다. 먼저 소재나 표현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데 유리하다. 현실세계에서 불가능한 자유로움이 꿈의 형식을 빌면 무한한 탐구가 가능하다. 그리고 책임 회피가 가능하다. 당대의 도덕에 어긋나거나 파격적인 소재와 내용, 표현 구사가 비교적 용이하다. 나중에 문제가 될 것이 우려되면 만사가 꿈이더라는 후렴구를 덧붙이면 만사 OK이다.
또 고전소설의 배경은 대다수가 국내가 아닌 중국을 시간적,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대주의의 발상인가? 먼저 국내는 영토가 협소하고 인구가 미약하다. 별난 인물과 사건이 발생할 여지가 적다. 즉 그다지 신비롭지 않다는 점이다. 따라서 국내가 배경일 경우 보다 현실적인 제재를 다루는 경향이 있다.
반면 중국의 경우 영토와 인구가 광대하여 미지의 존재, 신비로운 현상의 추구가 가능하다. 즉 흥미 유발이 용이하다. 이 점에서 정보통신이 발달한 현대에도 중국의 내륙과 오지는 여전히 생소하기 그지없다. 실크로드, 대황하, 차마고도 같은 TV 다큐멘터리를 보라. 따라서 중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은 대체로 환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구운몽 초반부에서 성진의 죄가 그토록 중한 지 의심스럽다. 잠시 마음이 미혹되었지만 곧 본연의 수행 정진에 돌아갔는데 말이다. 고전소설의 개연성 부족의 단면이리라. 전체로 보았을 때 그에게 불법을 전하기 위한 속성 코스를 밟게 하려는 육관대사의 의도라고 하더라도.
한편 성진이 남해용왕 군대와 일전을 벌여 동정 용녀를 구하고 동정용왕의 청으로 동정호를 방문한 후 돌아올 때 남악 형산을 구경하고 한 노승을 만나는 장면은 이 소설의 결말을 암시하는 복선이 깔려 있는 곳이다.
그런데 번역본에는 이 부분에서 결정적인 오역이 있다. 163면에서 용왕이 "곧 남악 형산이니 아름답고 신기한 산이거늘 아직 그 명성도 듣지 못하였느뇨?"라고 성진에게 말하는데, 원본 371면에는 "곧 남악 형산이니 신기하고 이상한 산이라. 어찌 깨닫지 못하느뇨?"로 되어 있다. 형산의 명성을 듣지 못하였느냐고 물음과 깨닫지 못하였느냐는 천지 차이다. 소설 초반부에 성진이 육관대사의 심부름으로 동정용궁에 다녀갔음을 상기하자.
이처럼 북한 번역본을 본 후 호기심이 생겨 후반부의 원문을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참으로 빼먹은 게 많다. 고사라든지 고전 인용 문구 등은 누락 내지 소략하여 고전의 향취를 상실케 하고 말았다.
몇 군데만 예시하면 번역본 55면과 원본 310면을 비교하면 경홍이 매파의 주선을 거절하는 대답이 번역본은 달랑 2줄인데 원본에는 사안석, 주공근, 이태백, 사마상여의 성명과 고사를 인용하여 5줄로 되어있다. 또 원본 389면 태후의 말을 소략한 것은 물론 난양공주의 평은 완전히 누락하였고 원본 418면의 잔치 장면도 번역본은 일반적인 문장으로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아무리 북한이 한문을 배격한다고 하여도 줄거리 위주가 아닌 깊이 있는 고전 독서를 위해서는 아쉽기 그지없다. 원문도 그리 어렵거나 생경하지 않으니 그냥 원문에다 각주를 다는 게 더 나았을 듯. 이 책으로 구운몽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 작품 자체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심어줄 지 모른다는 우려가 기우가 아니기를.
번역본의 제일 미덕은 원전 충실이다. 기본에 충실한 후 응용과 변용이 가능함을 상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