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견문 - 조선 지식인 유길준, 서양을 번역하다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8
유길준 지음, 허경진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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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책이 모다 고전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생생히 숨을 쉬고 싱싱함을 유지해야 참다운 고전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 <서유견문>이 옛책과 고전 중 어느 위치에 놓일지 궁금했다.
 
사실 명성은 자자하지만 일반인에게 친숙하지 않은 저서도 참 많다. 누가 그랬던가. 다윈의 진화론은 삼척동자도 알지만 정작 <종의 기원>을 읽은 이는 극소수라고. 아마 <서유견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책 제목을 보고서 개화기에 서양을 소개한 여행 개설서 정도로 이해했다. 저자 자신도 자신의 견문담과 남의 글을 짜집기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책을 읽어나갈수록 이것은 단순한 견문록이 아니라 견문록을 가장한 저자 자신의 정치론으로 이해되었다. 조선 최초의 유학생으로 당대 서양에 관해서는 최고의 권위자인 유길준이 선진 서양에서 받은 문명적 충격과 이에 대비한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비교하여 어떻게 하면 조국을 개화시킬 것인가를 견문록의 형식에 담아냈다.
 
그래서일까. 목차만 보더라도 서양 풍물보다 정치, 조세, 교육, 사회제도에 대한 분량이 압도적으로 비중을 차지하며, 상당 부분의 내용이 저자 자신의 주관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국제정치 관계를 논하면서 증공국과 속국에 대해 장황한 논리를 펼친다. 요즘에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구한말 당시의 정세를 상기하면 십분 이해된다.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은 조선말 개화기에 이르러 더욱 심해진다. 따라서 조선의 근대화를 도모하는 지식인에게 청의 간섭을 배제하려는 논리 개발은 중요한 과제라고 하겠다. 그것이 증공국과 속국 논리로서 조선은 청의 속국이 아니라 증공국이라는 것이다.(P.110~)
 
그런 유길준의 논리는 당당하다. "나라 위에 나라가 없고, 나라 아래에도 또한 나라가 없다."(P.107)며, "강대국이 자기 나라의 넉넉한 형세를 휘둘러 약소국의 정당한 권리를 침범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폭거이며 무도한 악습"(P.110)이라고 날카롭게 비판한다.

이처럼 청에 대해서는 분연히 떨쳐 일어난 유길준이지만 후일 일본의 조선 침탈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 연유가 궁금하다.
 
아직 개화 초기이다 보니 충분한 숙성을 통해 체화하지 못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스코틀랜드인, 아메리카 인디언 등에 대한 저자의 비판(P.123~124)은 전형적인 제국주의 시각을 여과없이 수용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모습도 나타난다. 납세의 의무를 강조한 것은 소위 악법도 법이라는 지나치게 정권지배자 중심 시각이며, 군주제의 옹호는 주독자층이 누구인가를 감안하면 이해할 수밖에 없다.

 "임금이 다스리는 정부의 국민들은...선대 임금들이 창업한 공덕을 만세에 받들어 지키는 것이 옳은 일이다."(P.167)
 "임금은 그 아버지고 국민은 그 자식이라고 할 수 있다."(P.221)
 
물론 현대의 시각에도 유념할 부분도 적지 않다. 재산권 보호에 대한 그의 의견("전 국민에게 커다란 이익을 줄 만한 일이 있더라도, 한 사람의 사유물을 해치게 되면 감히 시행할 수가 없다, P.144)은 극단화할 수는 없겠지만 공공의 이익이 아니라 부유층의 사익을 위해 공권을 동원하는 오늘날(얼마 전 재개발로 촉발된 용산참사를 보라)에 비하면 오히려 100년 전보다도 인식은 퇴보한 게 아닌가 씁쓸하다.
 
그리고 상인의 직분과 경계할 점 등 도리에 대해 설파한 항목(P.387-391)은 이 책이 단순한 서양문물 소개기가 아님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저자 역시 친일 개화파로서 나름의 견해가 없을 수 없다. 지혜로써, 용단으로써, 위력으로써 개화하는 방식(P.397)에 대한 주장에서 얼핏 갑신정변에 대한 비판과 변호의 인상을 풍긴다. 그의 사고에 따르면 갑신정변은 옳은 방식은 아닐 것이다.

 "한 나라의 정치 체제란 오랜 세월에 걸쳐 국민들의 습관이 된 것이다...급격한 소견으로 헛된 이치를 숭상하고, 실정에 어두우면서도 개혁하자고만 주장하는 자들은 아이들이 장난하는 것과도 같다. 임금과 나라에 도움을 주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해를 끼치는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다."(P.176)
 
이 얼마나 통렬한 비판인가? 이 단락을 집필한 시점이 언제인지 모르겠으나 여기서 그는 갑신정변의 실패를 예견했거나 아니면 그 실패한 결과를 목도하고 지적한 것이리라. 사실 갑신정변은 우리 근대사 기조를 바꾸어 놓았다. 일부 성급한 과격파에 의해 그 후 개화파는 친일의 앞잡이로 간주되었고, 자주적 개화는 시작도 하기 전에 싹을 잘리게 되었다. 개화의 죄인은 개화의 원수보다 폐해가 더 크다.
 
오늘날 개화는 케케묵은 단어다. 글로벌 시대에 무슨 시대에 뒤처진 말인가. 그런데 실상의 개화와 허명의 개화(P.398)에서 우리는 허명의 개화를 따르는 것은 아닌가. 개화의 원수는 사라졌지만 개화의 죄인은 여전하다. 더욱이 "입에는 외국 담배를 물고..외국말을 얼마쯤 지껄이는...개화라는 헛바람에 날려서 마음속에 주견도 없는 한낱 개화의 병신"(P.400)이 곳곳에서 난무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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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4.16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