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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리안의 유럽 침략
존 배그넬 베리 지음, 김성균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일단 유념할 사항이 있다. 이 책이 출판된 시기는 1928년이다. 지금부터 무려 80여 년 전이다. 저자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기에 활약했던 소위 대영제국의 전성기인 빅토리아 시대의 인물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저자의 의견이나 史實 가운데 일부는 현시점에서 보면 사실과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동안 어떤 역사학의 진보가 이루어졌는가 하는 의구심이 완독 후에 내게 생겼다.
흔히 세계사 시간에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라는 항목으로 배우는 그 시기를 바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다. 아시아에서 훈족이 서진하자 이를 피하여 게르만족이 대대적으로 로마제국으로 밀고 들어와 마침내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말았다는 일대 격변의 시기라고 하겠다. 동양사에서 비교하자면 5호16국 시대 정도라고 할까.
저자는 이러한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얄팍하며 잘못된 인식에 기초하고 있는지를 깨우치고 있다. 하기사 이 책은 저자가 행한 일련의 강의록을 편집한 것이므로 나 같은 일반인이 접하기에는 보다 용이한 장점이 있다.
여기서 '바바리안'이라는 용어는 멸시적 의미가 아니라 게르만족을 포괄하는 상위 개념으로 야만족과 비기독교도를 동시에 일컫는 의미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게르만족의 유력한 분파인 고트족(서고트족과 동고트족), 프랑크족, 반달족 등이 유럽 역사를 헤집어 놓았다. 그런 의미에서 게르만족의 대서사시인 <니벨룽겐의 반지>가 조상의 터전인 북구의 신화 및 전설과 많은 유사성을 내포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서기 375년에서 575년까지의 2백년 동안 유럽에 파고를 미쳤던 종족의 이름을 언급해 보자. 훈족(아시아계 유목민), 동고트족, 서고트족, 롬바르드족, 프랑크족, 반달족, 앵글족, 색슨족, 수에비족 등. 이 모든 종족이 단지 흉포한 훈족의 침입에 겁을 먹어서 대대적인 부족 이동을 감행했을까? 침입자의 세력에 비하면 수적으로 압도적이며 무력 면에서도 힘을 합치면 충분히 대결해 볼만할 텐데 말이다. 훈족의 서진 이전에 이미 바바리안들은 오늘의 독일과 동유럽 방면에서 서진을 감행할 충분한 동기가 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사실상 훈족은 이러한 추이를 앞당기는 방아쇠 구실을 하였을 따름이다. 훈족이 로마제국 해체 과정에서 촉진제와 지연제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는 저자의 의견은 충분히 음미할 만하다.
사실 역사를 참조하면 불가항력적인 순수한 외침에 의하여 국가가 무너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인체를 둘러싼 환경에는 언제나 건강에 적대적인 병인이 돌아다니고 있다. 인체가 튼튼하면 가벼운 감기에 그치지만 허약해지면 바로 치명적인 질병으로 발전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거대한 로마제국이 이민족과 국경을 맞댄 것이 한두 해가 아니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초기 게르만족과 슬라브족을 성공적으로 억제하고 있었다. 로마제국 자체가 내부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역량을 상실하였기에 국경을 넘나드는 바바리안을 실체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나중에는 오히려 바바리안에 제국의 운명을 맡기게끔 되고 말았다. 하필이면 동로마는 멀쩡한데 서로마만 문을 닫은 이유를 저자는 군사편제의 차이에서 찾고 있다. 서로마에서는 군권이 총사령관 일인에게 집중되어 총사령관이 황제마저 허수아비로 만들고 실권을 휘두르는 사례가 빈번하였다. 반면 동로마에서는 다섯명의 군사령관에게 군권이 배분되어 있어 상호견제 기능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황제의 권위와 권한이 상당 부분 장기간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P.46).
반달족이 서로마의 곡창지대인 아프리카를 접수한 과정을 보면 결국 제국의 배분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서로마가 아프리카를 상실하지 않았다면 바바리안에게 그리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달왕국이 서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로마는 연명에 급급하였고 갈리아와 스페인에 대한 지배력도 급속도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P.182-183). 이것이 세계사에서 반달족과 왕 가이세리크가 수행한 가장 큰 과업이다.
역사는 오도아케르가 서로마제국을 멸망시켰다고 가르친다. 저자는 이를 반박한다. 그는 '서로마제국'이라는 표현이 부적당함을 지적한다. 이는 로마제국 서부를 지칭하는 인습적인 표현이며 당시 로마인들은 오직 하나의 제국만을 인정하였다고 한다. 오도아케르는 허울뿐인 서로마 황제를 단절시켰지만 여전히 로마제국의 형식을 인정하였다. 즉 콘스탄티노플의 로마황제가 임명한 서로마(이탈리아)의 집정관이었다. 오도아케르를 축출한 동고트족의 테오데리크도 그 형식은 유지하였다. 그러면 이를 깨뜨린 것은 누구일까? 이 책에서는 명확히 다루지는 않았지만 바로 프랑크족이다. 그들은 다른 종족과는 달리 출발부터 로마제국의 허울을 인정하지 않았다. 프랑크왕국이 전성기를 맞이하고 분열되면서 유럽은 비로소 본격적인 중세시대로 이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찬란했던 로마문명의 후광을 일시에 암흑으로 몰아넣은 부정적인 인식 탓인지 바바리안의 유럽침략 시대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듯싶다. 그러기에 오래된 이 책이 전혀 진부하지 않고 참신하게 다가온다. 더구나 내용 구성이 난삽하지 않아 문외한도 비교적 흥미진진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다. 다만 전문학술서와는 달리 체계가 다잡혀 있지는 않다는 약점은 강의록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인정하면 너그러워진다.
최근의 연구성과를 담은 저작을 읽고 싶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피터 히더의 <로마제국 최후의 100년> 출간이 반갑게 다가온다.